[소설 입선] 포항행 직통열차
포항행 직통열차 1 내가 탄 13호차에는 나를 포함하여 총 세 명이 탑승했다. 포항까지 직행이니 그들이 곧 나의 길동무가 될 참이었다. 승차권에는 입석으로 인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편히 앉아있을 만한 자리가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남자는 머리가 벗겨져 두피가 훤히 드러난 중년의 아저씨였다. 정장 차림이었지만, 블레이저의 겉면엔 여기저기 실밥이 풀려있어 헤져보였고, 살짝 드러나는 셔츠의 목덜미 부분은 이미 누렇게 찌들어버려 셔츠가 보낸 세월을 짐작케 하였다. 분명 십년 전에는 근사했을 양복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깔끔함이나 세련됨을 선사하기 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는 내가 기차에 들어설 때부터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 중이었다. 나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기 때문에 내용은 볼 수 없었지만 나 역시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저 야심한 시각에 짬을 내어 밀린 업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갔다. 남자는 중간 중간 간이 탁자 위에 올려둔 햄버거를 집어먹었는데, 냄새는 퍽 맛있게 났을지 몰라도 게걸스레 씹는 소리는 살짝 메스껍게 들렸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어쨌거나 나에겐 크게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다른 쪽이었다. 나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은 여자는 아저씨가 앉은 좌석보다 세 자리나 더 뒤에 있었는데, 여자의 얼굴은 나이를 어림짐작하기도 힘든 오묘함을 띄고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녀가 스무 살이라고 했다면 믿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그녀가 사실은 불혹이라고 정정해주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의심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 얼굴은 왠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듯한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 쓰였던 진정한 이유는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을 피하기는커녕 마치 오기가 생겨 나와 한판승부를 벌이기라도 하는 듯 더욱 또렷이 쳐다보았다. 한기를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와 가장 먼 자리를 골라 앉았다. 과연 저 여자의 정체는 무얼까. 귀신일까. 사람일까. 사람이라면 혹시 나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단지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것일까.(슬쩍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에 묻어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있는 방향에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짧은 시간동안, 피하고 싶은 잔혹한 시선을 마땅히 설명할만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의 뇌를 훑고 지나갔지만 신통한 것은 개중 아무것도 없었다. 이윽고 열차는 출발했다. 오후 11시 20분. 예정된 시각이 되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런 심야에는 승객들이 열차를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니, 애초에 승객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역에서 거의 한 시간이나 가까이 대기한 후 출발하기 때문에 여간 바보가 아니고서야 놓칠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포항을 향하여 출발한 후 아직까지도 정체모를 여자의 시선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는 그녀와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럴 때 책이라도 갖고 왔으면 좋으련만. 텅 빈 가방을 보며 공연히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포항역에 도착하게 될 예정 시각은 새벽 3시 30분. 기차의 좋은 점은 웬만해선 시간이 어긋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정신병자의 눈초리를 참는 것도 네 시간이면 족하고, 나로서는 그 시간에 잠이나 청해두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결국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면 포항으로 향하는 네 시간동안 주구장창 나만 바라보진 못할 것이 자명했다. 한번 마음을 편안히 먹으니 얼어붙으려던 간담이 그렇게 서서히 녹아내려갔다. 2 열차가 출발하고 30분이 지난 후,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시선을 나에게서 차창으로 옮긴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여자의 자리를 엿보니 그녀는 흐리멍덩한 눈길로 덧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방해받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여자로선 어디하나 예쁘다고 할 만한 구석이 없었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선 그럭저럭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머릿결은 푸석해서 볼품없었고 피부는 창백했으며 입술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 부르텄지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만큼은 어딘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쳐다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큰 눈망울에는 그녀가 무언가 매우 소중한 걸 잃은 듯 슬픔과 분노가 어려져 있었는데,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눈동자에 몇 분씩이나 빠져있자니 순간 옆자리로 가 그녀의 사연을 듣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가족 중 한사람을 여의고 돌아가는 길일까. 아니면 연락을 받고 직접 장례를 치르러 가는 길일 수도 있겠지. 가족을 잃는다는 건,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죽음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경험이다. 소중하다고 할 순 없지만, 분명 가치 있는 경험이긴 했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 도박과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말년에 그 흔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해버렸다. 스스로 방에 갇혀 모든 창문을 닫고 테이프로 틈을 막아둔 뒤 연탄불을 피워 질식해 죽어버렸는데, 아직도 우리 집 안방엔 그 때의 그 연탄 때문에 방바닥에 눌러 붙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버지가 죽고, 그 이듬해에 나의 어머니 역시 입원해있던 정신병원 병동 안에서 숨겨놓았던 숟가락으로 목을 그어 자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 때 도박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했었는데, 초반엔 그 사업이 잘 풀려 우리에게 많은 부를 안겨다주었다. 그러나 불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고,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우리 집 현관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둘은 언제나 밖에 있었고 집을 지키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아마도 그 즈음에 아버지는 도박을 통해 빚을 갚기로 하고, 어머니는 지금껏 본인이 소유하던 수많은 명품들을 더 비싼 값에 팔기 위해 흥정하며 지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안가 우리가 갖고 있던 빚에 아버지의 도박 빚까지 얹어지자 어머니의 정신은 이상해졌다. 한 소설가는 자기의 어머니의 자살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평생을 남편에게 속박당하고, 굴종하며 살아온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의지를 실현시킨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부모의 죽음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 둘은 평생에 걸쳐 자유의지를 실컷 발휘해가며 살았고, 죽을 때마저도 제 멋대로 떠났기 때문이다. 둘에게 그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가족과 죽음, 오랜만에 그 두 주제에 대해 사색하다가 문득 내 머릿속에 야릇한 생각이 스쳤다. 저 여자,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닐까. 저 여자가 결코 내 취향의 여성상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으니 앞서 느꼈던 불편한 시선들이 어느 정도 용서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 불안감과 함께 약간의 설렘 또한 싹트게 된 것이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말을 건네야 하나. 이제 내 머릿속은 30분 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그리고 10분 전과는 또 다른 이유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기로 한 계획은 철회하는 걸로 내 마음 속에서 결론이 났다.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여자의 첫 인상이 워낙 최악으로 다가왔었기 때문에 그녀를 향한 나의 관심은 호기심의 수준, 그 이상을 넘어가진 않았다. 3 포항으로 출발한지 한 시간 째 접어들면서 설렘은 다시 냉정으로 뒤바뀌었다. 한참을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치고 만 것이다. 이전에 내가 느낀 시선의 불편함을 이번엔 역으로 그녀가 느꼈는지 불현듯 차창에서 나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린 듯 했다. 또다시 시작된 여자의 적의어린 눈빛 덕분에 나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그녀가 첫눈에 나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꼈다 하여도 십중팔구는 부끄러움에 힐끗 쳐다보는 것에서 끝이 나지, 저런 식으로 뚫어지게 응시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저 눈빛은 호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 저건 ‘살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니, 나는 다시 몹시 불안해졌다. 결과적으로 저 여자의 정체가 첫 만남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 정신병자일까. 아니면 향간에 떠들썩한 무차별 살인을 즐기는 사이코패스인가. 최근 전국적으로 같은 수법의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쏟아지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역과 범행 장소가 매우 다양해서 경찰이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하였다. 자칫 개별적인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그 많은 범행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살인 방식이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복부에 여덟 군데 자상, 목에 세 군데 자상, 그리고 왼쪽 가슴에 십자가 문양의 칼로 그어진 자국이 있었다. 경찰은 열세 구의 시신이 훼손된 부분의 공통점을 인지하고 이 사건들을 연쇄살인으로 규정지었다. 13명을 죽였다. 그것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를 횡단하며 죽이고 다닌 것이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살육 기계와도 같은 행적이었다. 그녀가 만약 그 주인공이라면 많은 것들이 설명이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이상함을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그녀가 이용하는 승객이 거의 없는 이 야간열차를 택한 점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이 시간에 서울에서 포항으로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이렇게 저급하고 느려터진 열차를 예매하는 사람은 더욱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차를 선택했다면, 분명 급하게 출장이 잡혔다는 등의 사정이 생겨 시간에 맞는 열차를 찾다보니 어쩔 수 없이 타게 된 경우이거나 저렴하게 가기위해 탑승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집안에 일이 생겨 온 가족이 포항을 가야할 일이 생겼는데, 마땅히 운전을 할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싼 이 야간열차를 선택할 경우도 적은 확률이지만 존재하긴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가족 단위가 아닌 이상, 직장인일 수밖에 없다. 내 알량한 지식으로는 그 정도의 경우밖에 추릴 수 없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경우도 그 흔한 가방하나 소지하지 않은 그녀의 차림새를 설명해주진 못하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낯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대는 바로 저 눈빛이다. 저 눈빛에 담긴 분노는 도대체 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분노를 과연 내가 어떻게 해소해줄 수 있는가. 그 해소법이 그저 나의 죽음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굳이 살인이 아니라도 좋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해코지하기 위한 목적으로서라도 이 기차는 더할 나위없는 최적의 장소였다. 분명 그녀는 이 열차에 타 사냥감을 찾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내가 눈에 딱 포착된 것이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사이코패스이고 살인광이며 나를 다음 사냥감으로 침 발라 놓은 것이라면, 나는 저항해야 할 것이다. 나약한 영양이 표범의 송곳니를 뿌리치듯 도망가야 할 것이고, 그 도망이 실패한다면 그녀의 급소를 노려 처절히 싸워야 할 것이다. 우선, 내가 처한 상황에서 과연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환경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주변을 서둘러 둘러보았다. 같은 칸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었던 대머리 아저씨는 이미 십분 전부터 자기 자리와 그 옆 좌석을 침대삼아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른 칸에 사람들이 얼마나 앉아있는지도 나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승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할까도 고민했지만, 내가 탄 기차는 열악하고 구닥다리인데다 야간열차였기 때문에 기껏 승무원이라 해봤자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가장 큰 걸림돌이 하나 남아있었는데,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선 어찌되었든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여자 쪽에서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를 노릇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인마가 나를 죽이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사형수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쪽에서 먼저 죽으러 가고 싶진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내 속에서 생명이라도 얻은 듯 빠르게 구체화 되었다. 나는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에 이전처럼 직접적으로 그녀를 쳐다볼 순 없었지만, 계속해서 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는 살기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계속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저 주머니 안에는 칼이나 송곳 같은 무기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끔찍한 도구로 지금껏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사냥했겠지.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나를 휘감아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4 출발한 지 두 시간 째, 그녀가 나를 노려본지 한 시간 째 들어서자 나의 심장은 극도의 불안감과 흥분감이 뒤섞여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박동 소리는 철륜 소리를 뚫고 멀리 있는 저 살인마의 귀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매우 크게 들렸다. 불현듯 나는 내 몸을 지킬 무기의 필요성을 느껴 급히 가방을 뒤졌다. 여벌옷과 짧은 밧줄, 가위와 청색 테이프가 들어있었고, 가방 맨 앞주머니엔 노트 몇 권과 필통이 들어있었다. 무기가 될 마땅한 것들이 없어 처음엔 실망하였지만, 이내 필통 안에서 작은 사무용 커터칼을 찾아 꺼냈다. 나는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우선 각자 열차의 끝자리, 대각선 방향으로 앉아있었기 때문에 살인마와 나의 거리는 꽤 먼 편이었다. 기차 한 칸의 거리, 좌석으로 따지자면 우리 사이의 15줄의 좌석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탄 열차는 13호차. 기관사와 가장 먼 열차였다. 승무원이 있다한들 과연 둘러보러 올지도 확신할 수 없는 돼지의 꼬리와도 같은 위치였다. 내가 앉은 자리 뒤로는 남자 화장실이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여자 화장실이 있었다. 그러니, 여자가 내 쪽으로 온다는 것은 필시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로의 접근을 공격시도로 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살인마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면, 그녀가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했다. 그런 이유로 칼의 날은 빼놓은 채로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놓았다. 우선 목을 세 번 그을 것이다. 날이 얇아 부러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날을 세워 찍는 공격은 가급적이면 피해야한다. 여자가 쓰러지면 그 틈을 타서 다시 나를 공격할 수 없도록 밧줄로 그녀의 몸을 칭칭 감아 묶을 것이다. 그리고 테이프를 찢어 그녀의 입을 막아야겠지. 괜히 아저씨가 잠에서 깬다면 내가 공격하는 중간부터 상황을 보게 될 터이니,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테이프를 마저 찢어 두 눈에 붙일 것이다. 그 눈. 세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빌어먹을 두 눈까지 막고 나면 이제 그녀가 다시 공격할 수 있는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내리는 것이다. 누구에게 알릴 필요 없이. 혹여나 살인마가 살아남아 내 정보를 알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여기까지가 내가 믿고 있는 생존의 정확한 매뉴얼이었다. 5 실행으로 옮길 기회가 찾아왔다. 그녀가 일어섰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벗어나 천천히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는 동안 내 몸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나는 오른손을 재킷 왼쪽 안주머니에 넣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서둘러 오른 손을 제 위치로 옮겼다. 만약 공격이 실패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막상 거사의 순간이 다가오니,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결국 성공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더해져 나는 내 손안에 있는 칼을 더욱 꼭 쥐었다. “저기요.” 품에서 칼을 꺼내려던 찰나에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러, 뒤에 이어지려던 내 행동은 순간 갈피를 잃고 멈춰버렸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손을 자세히 보니 말보로 레드 담배 한 갑이 쥐어져 있었다. 뚜껑이라 할 만한 부분이 찢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피우던 담배였다. 담배를 든 그녀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까 지나가시다가 떨어뜨리신 것 같아서 주워서 돌려드리려는데, 그 쪽이 너...”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더 말을 하려다 도중에 멈춘 뒤 담배를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잰걸음으로 황급히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여자는 살인마다. 앞서 일어났던 그녀의 일련의 행동으로 인해 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분명 담배를 떨어뜨린 적이 없다. 담배는 내 뒷주머니에 들어있었다. 실수로 떨어뜨릴 순 없는 위치이지만, 뒤에 있는 누군가가 슬쩍 빼가기에는 아주 좋은 위치이기도 했다. 그녀가 참으로 주도면밀하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그녀는 처음엔 나를 죽이기 위해 접근을 했을 것이고, 본인을 기다리고 있던 나의 자세와 결의에 찬 내 분위기에 짓눌려 움츠러든 것이 분명했다. 우선 위기는 가까스로 넘긴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모르니 완전히 경계를 풀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로 돌아간 여자는 나에게 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나의 조그마한 빈틈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서 파고들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긴장의 고삐를 바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6 기차가 종착역에 다다를수록, 나는 나의 근심이 계속해서 가벼워지는 것을 쉽게 체감할 수 있었다. 마치 포항역이 내 행복의 기준점이라도 된 듯, 나의 감정 상태는 그렇게 내가 탄 열차와 함께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기차는 고대하던 포항역에 도착하였다. 출발시각은 그토록 정확했음에도, 어째서인지 도착한 시각은 예정보다 37분이나 늦어졌다. 나는 누군가 나의 행동지침을 내려주기라도 한 듯, 너무도 당연하게 여자가 하차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는 이미 출구 쪽을 향해 나보다 십 미터 정도 앞서가 있었다. 만족스러운 안전거리라 생각하고는 그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뒤를 밟았다. 출구 쪽에 다다르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나를 한번 홱 돌아보더니 부리나케 달려 도망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젠 완전히 안전해진 것이다. 다섯 시간 가까이 굳었던 온 몸의 힘이 풀리자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았다. 오늘도 나는 죽을 뻔 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겠다. 나호성 (전기공학전공) 작품을 읽을 때마다 수정해도 부족한 부분이 계속 튀어나와 처음엔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입선 연락을 받은 지금은 누군가 제 작품을 읽어주시고 알아봐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다가옵니다. 이 행복함과 감사함이 훗날 제 글쓰기 여정에서 위대한 첫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평론 부문 심사평
평론 부문 심사평 정의진 교수(프랑스어권지역학전공) 올해 상명 학술상 평론 부문 당선작은 <겨울에서 여름을 상상하기-카코포니의 <숨의 여름> 무대 평론>이다. 카코포니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음악인은 아니다. 그러나 매 곡 매 앨범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확고한 문제의식과 실험적인 음악 형식, 혼신의 힘을 다하는 무대 퍼포먼스와 독창적인 창법, 다양한 스타일의 뮤직비디오 등으로 대중음악계의 평론가들과 동료 음악인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는 음악인이다. 이 평론은 이러한 카코포니의 음악 세계와 무대를 차분한 논지와 정돈된 문장으로 비교적 잘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문장과 논리 전개의 수준이 분명히 한 수 위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비유적인 시적 문장들이 다소 과잉되게 사용되어서 논지 전개와 적절하게 어우러지지 못한 부분들도 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가작인 <황금은 색이 바래지 않는다>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 되었던 유대계 폴란드인 피아니스트 슈펠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피아니스트>에 대한 평론이다.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쇼팽의 ‘발라드 no.1’이 불러일으키는 감흥과 그 의미, 나아가 홀로코스트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이 평론은 설득력 있는 논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평론과 사적인 감상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문장과 표현들, 이 영화의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라는 가장 기본적인 참조 사항도 제시하지 않은 점 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입선 <식문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본인이 5년 동안 직접 경험한 식문화 체험을 바탕으로, 상권의 급격한 변화, 오미카세의 확장, 특정인 추천 맛집을 최근 식문화 변화의 핵심 요소로 제시하고 있다. 재미있고 유용한 글이었다. 그러나 평론 대상과 일정한 분석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사적 체험과 감정의 즉자적인 서술이 일부 있다. 좀 더 적확한 어휘와 개념을 선택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투고작 전체를 놓고 보면, 자주 비문들이 발견되는 경우, 맞춤법과 문장부호 및 띄어쓰기 등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소홀히 하는 경우들도 눈에 띈다. 평론을 포함하여, 특히 공적으로 제출하거나 응모하는 모든 글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점검과 확인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습관과 태도가 더 나은 결과의 전제조건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평론 당선] 겨울에서 여름을 상상하기 - 카코포니의 <숨의 여름> 무대 평론
겨울에서 여름을 상상하기 - 카코포니의 <숨의 여름> 무대 평론 참고할 수 있는 팜플렛.pdf (링크 이동) 카코포니 <숨의 여름> 무대 (링크 이동) 이찬영 (국어교육과) 멋진 아티스트가 근사한 공연을 준비해주신 덕분입니다. 좋은 예술이 마땅한 자리와 언어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뮤지션 카코포니의 음악이 많은 분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평론 가작] 황금은 색이 바래지 않는다
황금은 색이 바래지 않는다. 당신은 쇼팽의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클래식을 별로 들어보지 않아서 쇼팽이 무슨 곡을 썼는지, 그 곡들이 어떤 멜로디를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쇼팽이 쓴 곡들을 들어보면 ‘아, 이 곡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이 그렇듯이 안 들어봤을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이번 글에서 다룰 영화 피아니스트에서는 주로 쇼팽의 곡이 나오는데, 쇼팽의 곡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낭만’이다. 쇼팽의 발라드, 야상곡. 그것들은 언제 들어도 마음을 두둥실 떠오르게 해주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들이다. 하지만, 그런 쇼팽의 곡이 자주 등장하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 겪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 이야기들은 참으로 암울한 비극이다. 영화는 슈필만이 라디오에서 라이브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쇼팽의 야상곡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는 녹음실에 어울리지 않는 굉음이 들리고, 라디오 녹음실의 창문이 부서진다. 집으로 대피한 슈필만이 본 것은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는 뉴스였다. 그 이후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이 유대인 탄압을 시작한다. 유대인인 슈필만은 그 탄압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며 살아간다. 영화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용은 이것이다. 그 내용은 마치 ‘안네의 일기’ 같았다. 같은 시기에 나치 치하에 있던 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난 내용이다 보니 이런 유사점이 생길 수밖에 없구나 생각하면서 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유대인이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보통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와 다르게 나치는 가해자, 유대인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정리를 하지 않는다. 같이 잘 지내다가 나치에게 유대인을 팔아 넘기는 사람들, 같은 유대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유대인들. 나치가 존재하는 이상 약자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용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인간적이라고 하면 인간적이고, 잔혹한 현실이라고 하면 잔혹한 현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았다. 영화 대부분의 내용은 슈필만이 나치를 피해 도망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것만 보면 이 영화는 음악영화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음악이 나오는 부분이 손에 꼽아도 될 정도로 적고, 그나마 음악이 나오는 부분은 슈필만이나 그의 동료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음악영화라기보단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에게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음악단이 흥겨운 음악을 연주한다. 독일인 병사는 그 음악을 웃고, 손뼉을 치며 즐겁게 듣고 있다. 병사는 흥이 돋았는지 출근하기 위해 나와있던 유대인들을 잡아서 끌고 나와 춤을 추게 시킨다. 춤이란 보통, 흥겨운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춤을 춰야 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말라 병들었고, 그들에게 춤을 시킨 독일인 병사의 표정에만 흥겨움이 가득하다. 결국 엉성한 자세로 춤을 추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넘어진다. 그 사람은 목발을 짚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흥겨운 음악은 계속해서 흐르고, 독일인 병사는 아직도 즐거워한다. 그 밝고 어두움의 대비가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저런 장면이 현실에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껏 봐왔던 어떠한 공포영화보다도 공포스러웠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막바지로 향한다. 슈필만의 처지는 처음 모습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말끔한 양복을 입고 따듯한 라디오 녹음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는 게토의 폐허 속에서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안전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며 나치를 피해 다닐 수 있던 영화의 초중반부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슈필만은 우연히 발견한 통조림을 까먹으려다 그것을 떨어트리고, 마침 그 앞을 지나던 독일군 장교에 의해 발견된다. 그 장교는 보통의 나치 군인들과 다르게 유대인인 슈필만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하던 사람이냐고. 슈필만은 답했다. 피아니스트라고. 그렇다면 피아노를 연주해보라고 독일군 장교는 말한다. 그렇게 슈필만은 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연주를 시작하게 된다. 나는 그 연주 장면을 보고 이 영화의 모든 것들이 그 하나의 연주 장면을 위해 존재했다는 것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포탄과 총알로 엉망이 된 폐허 속 운 좋게 살아남은 피아노를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던 피아니스트가 연주한다. 그가 연주한 것은 다름 아닌 폴란드의 천재 피아니스트 쇼팽이 작곡한 ‘쇼팽 발라드 no.1’. 추위에 손을 벌벌 떨면서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안고 있으면서도 슈필만은 폴란드의 선율을 연주한 것이다. 그의 생사를 쥐고 있는 사람은 독일인. 살아남고 싶었다면 베토벤과 바흐 같은 유명한 독일인 작곡가들의 음악을 연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슈필만은 쇼팽을 연주했다. 그의 영혼만큼은 독일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독립을 외쳤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느낌이었을까. 슈필만의 혼을 담은 쇼팽 연주는 폐허를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메워갔다. 그 연주를 들으며 음악이 세대를 초월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유럽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 나타나는 슈필만의 쇼팽 발라드 연주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눈물이 나오는 이유는 대체 왜일까? 연주가 귀가 아닌 영혼에 울리는 느낌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음악이 연주된다는 것은, 그 연주되는 상황이, 그 연주자의 혼이 보고 듣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슈필만의 연주를 들은 장교는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몰래 지원해준다. 그 덕에 슈필만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난 뒤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를 다시 연주하는 장면을 비춰준 뒤 영화는 끝난다. 나는 영화를 본 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일까. 전쟁이라는 것은 인간성을 어떻게 훼손하고, 그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우리는 인간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철학적인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 생각 끝에 나온 결론은 단순했다. “아름다움을 잊지 말자.” 슈필만이 겪었던 일을 생각해보자. 인간성의 상실된 공간, 서로의 미간에 총구를 들이밀던 시기에 그는 수없이 꺾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가진 감정들, 연주로 만들어내는 행복. 자신이 살아오면서 마주했던 아름다움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시기에는 그게 정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켜냈고, 그 덕에 목숨마저 건질 수 있었지 않은가. 요즘, 혐오의 시대라 불리는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 우리는 계속해서 악한 감정들과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때 비틀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열매를 맺어내기 위해서는 씨앗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면 색이 바래지 않는 황금처럼, 마음속에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상황과 마주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힘을 줄 것이다. 이지훈 (문헌정보학과) 가작에 당선되었다는 문자가 와서 정말 놀랐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 같았죠. 곧 크리스마스라 이런 기쁜 일이 찾아온 것일까요?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론 입선] 식문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문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먹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의식주 중에서 '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고, 누구나 어디서든지 '먹는 것'을 접할 수가 있다. 집에서도 바깥에서도 먹는 생활은 이어진다. 매번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한다. 밥을 먹을지, 빵을 먹을지, 면을 먹을지, 어떻게 조리할 것인지, 혼자서 먹을 것인지, 친구와 함께 먹을 것인지, 잘 보이고 싶은 사람과 함께 먹을 것인지까지도. 나는 매 끼니 밖에서 어떻게 먹을 지를 고민하는 것은 일종의 기획 과정이었다. 이 기획은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기획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흥미롭다. 흥미로운 일의 연속이고, 내가 '먹는 것' 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서울 생활과 이 관심사는 동일선상에 놓여있다. 상명대에 오자마자 입사한 기숙사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외식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이 물리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겨 학교 근처의 업장들을 모두 방문하게 되자, 바깥 상권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세검정을 벗어나 부암동으로 가고, 부암동의 업장을 다 가보고 나면 서촌, 그리고 광화문까지 나아갔다. 이 과정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는 먹는 것에 사용하는 비용, 즉 식비일 것이다. 미각의 기억이 누적되기 시작할수록 음식의 양보다는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더욱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했고, 그만큼 식비를 더 쓰기 시작했다. 돈을 쓴 만큼 달라지는 맛이 신기해, 자극을 받고 더욱 돈을 쓰는 순환이 이어졌다. 내가 먹은 것들이 성취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먹는 존재로써, 이렇게 식비를 쓰는 생활을 5년동안 해오면서, 식문화가 어떻게 변화하는 지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상권의 급격한 변화, 오마카세의 발달, 특정인이 추천하는 맛집이다. ‘상권’은 늘 바뀌고 변화하지만 그 중심에는 명동, 홍대, 강남과 같은 전통적인 상권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코로나 전후로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을지로, 성수, 용산. 이 곳들은 모두 전통적인 상권인 명동, 홍대, 이태원의 특징에서 벗어난 ‘신흥상권’으로 분류되며, 상권에서 근무하는 인구들이 상권 내에서 소비하는 내수가 강한 곳이다. 이 상권들은 상업부지의 개발과 겹쳐지며 특정 업장의 새로운 시도로 외부인들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상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을지로의 기존 소규모 공장들과 ‘신도시’, 성수의 지식산업센터와 ‘대림창고’, ‘어니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과 ‘효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을지로의 '신도시'는 상가는 1층이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린 곳이다. 공장이 즐비한 골목의 건물 5층에 자리를 잡고 을지로 인근에서 온갖 폐기물을 가져와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꾸며냈다. 성수의 '대림창고'와 '어니언'은 기존의 폐공장 건물을 인수해 건물 본연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살리고, 교외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대형 카페를 그대로 서울 도심에 갖다놓았다. 용산의 '효뜨'는 기존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먹던 곳에서 타협 없이 이국적인 음식과 공간을 그대로 배치해, 가게 안에 들어서면 마치 해외에 온 듯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이러한 업장들을 방문하기 위해 유입된 외부인들은 상권의 내부인들과 자연스레 섞인다. 자연스레 상권의 소비시장이 커지기 시작한다. 이를 따라 외부에서 새로운 업장들이 들어오고, 유사한 시도를 하는 업장들이 유입되기 시작하며 특색을 띈 상권으로 발전하는 순환을 보이고 있다. 상권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업장들은 가게가 생길 당시의 상황과 인식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게 반영되고 생겨난 변화는 '오마카세'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마카세’는 미식가나 상류층들만 가는 사치스러운 일식당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 자영업자들은 전환세를 맞는다. 자영업, 그 중에서도 음식들을 취급하는 업장들은 큰 영향을 받았다. 코로나에 감염 될 위험성을 감수할 만큼 특별한 것이 없는 가게, 즉 줄을 서는 ‘맛집’이 아닌 이상, 발길을 끊는 손님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폐업을 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불확실성이란 요소가 커졌다. 자영업자의 입장에서는 불확실성보다는 예측할 수 있는 확실성을 선호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오마카세'는 바로 이 확실성을 제공할 수 있는 형식이다. 예약과 코스로 구성된 요리를 내주는 시스템을 통해 이윤을 계산하고 측정할 수 있다. 자영업자들은 이러한 장점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오마카세' 업장들은 기존의 고가 일식 오마카세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식에 머무르지 않고 한우, 파스타, 야키토리, 튀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업장들이 오마카세의 형식을 차용해오기 시작했다. 또한, 5만원대부터 많게는 20만원대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가격대의 업장이 생겨나 그 가격에 맞는 합당한 경험을 제공한다는 인식을 받기 시작주고 있다. '어딘가에 다녀왔으며, 어떠한 음식을 먹고 SNS에는 차마 다 담기지 못하는 수많은 -사진들과 함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오마카세'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이로 인해 '오마카세'는 특정한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 아닌 새로운 영업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음식을 공급하는 이는 오마카세와 같은 형식을 차용하며 확실성을 얻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소비하는 이들도 확실성을 선호한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검증 된 곳에 방문하고자 한다. 그러나 코로나, 상권의 변화와 함께 업장들은 사라지고 빠르게 생겨나고 있다. 기존의 TV 프로그램에서 접하는 맛집, 부모님이나 선배가 데려가는 곳과는 다르게 최근에 생겨난 수많은 업장들은 리뷰가 없거나 적은 곳이 대다수이다. 이러한 곳들은 소비자들에게 불확실성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업장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는 최전선에 나선다. 불확실성을 선뜻 소비하며 그 속에서 좋은 곳을 발굴해낸다. 매체를 통하여 발굴해낸 곳을 소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소비자들은 이들을 통하여 확실성을 얻고 방문한다. 이곳에서 얻은 경험이 만족스러웠을 경우, 이들이 올린 정보를 신뢰도가 높다고 인식한다. ‘최자로드’, ‘성시경의 먹을텐데’, ‘이영자 맛집’, ‘맛타고라스’, ‘비터팬’, ‘푸딘코’, ‘또간집’과 같은 인플루언서들을 주축으로 한, 특정인이 추천하는 맛집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따라 자신도 방문했다며 인증샷을 올리고 경험을 전시한다. 이로 인해 인플루언서들이 제공한 가이드라인은 더욱 빠르게 전파되고,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진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간접적인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된다. 상권을 산책하다 눈에 띄는 줄이 길게 늘어선 맛집, 친구가 SNS에 올린 오마카세 후기, 유튜브에서 유명인이 혼자 맛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영상. 수많은 간접적인 경험들은 방문해서 먹어보고 싶다는 직접적인 욕망을 자극한다. 먹고자 하는 욕구는 의, 식, 주 중 제일 접근하기 쉬워 방문으로 빠르게 연결되고, 반응이 즉각적으로 드러나며, 변화에 반응이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그렇기에, 식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고, 그 변화를 지금에 들어서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식비'일 것이다. 그 식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식비와 선택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것에 비용을 지불한다. 그 비용에 얼마를 지불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지는 너무나도 다양하다. 바깥에서 먹는 식사도 예외는 아니다. 바깥에서 사먹는 음식들의 원가는 35%을 넘지 않는 것이 외식경영에서는 정석이라고 말한다. 이 원가율은 메뉴에 들어간 식재료의 원가를 포함하고, 그 외의 부대비용을 제외한 15%의 순이익을 얻는 것이 평균적인 비용 책정법이다. 부대비용은 여러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진다. 월세, 인건비, 관리비, 부가세, 잡비와 같은 부대비용들이 한 메뉴의 가격에 반영되어 다양한 가격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느 길거리에나 식당들이 있다. 직장인들이 많은 오피스 상권의 몇천 원짜리 백반집, 분식집의 삼천 원짜리 라면과 김밥, 적당한 가격에 일정한 퀄리티를 보장하는 프랜차이즈들, 약속을 잡거나 놀러갈 때 먹는 만 원에서 이만 원어치 음식을 파는 식당들을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길목에, 오마카세 형식의 식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형식을 가진 식당들은 적게는 수만 원부터 많게는 수십만 원까지, 다양한 가격대를 자랑하지만 여전히 선뜻 한 끼로 선택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왜 그렇게까지 비싼 음식을 먹는 사치를 부려? 그 당시의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하면 기껏해야 술을 포함해 삼사만 원 내외로 지출하고, 좀 비싸게 먹었네? 라는 생각을 하던 사람이었다. 한 끼로 먹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임에도 매달 새롭게 생겨나는 오마카세 업장들과 파인다이닝에 왜 그렇게까지 열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SNS에 올리기 좋은 걸까? 그렇다면 왜 굳이 방문을 할까? 라는 생각을 품은 채로 외면해왔다. 그러나 먹는 관심사가 같은 지인들의 추천을 계속 접하게 되었다. 결국 한 번쯤은 경험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고 머지 않아 제주도에 위치한 한 오마카세 식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특색이 있는 재료를 이용한 사시미와 스시가 나오는 코스, 요리사와 직원의 깔끔한 접객, 진중하게 요리를 즐기는 손님들. 불편하거나 실망스러운 점도 없이 하나하나 빠질 게 없는 식사였고, 셰프님과 장장 2시간에 걸쳐 소통하는 과정을 거치며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었고, 인당 14만원이라는 비용이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을 품은 채로 식당을 나섰다. 일정한 식비 내에서 가성비에만 집중하고 정보를 찾아보고 찾아간 맛집이 실패했던 경험에 질려있던 나에게는 큰 변화였다. 2만 원짜리 파스타를 10번 먹었다면 그 중에서 맛없는 파스타를 먹을 확률은 얼마일까? 이런 파스타를 10번 먹고 내가 만드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거나, 음식에 문제가 생겨 컴플레인을 거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마카세나 다이닝은 블로그만 찾아보아도 코스 하나하나 사진을 촬영하고 감상을 써놓은 후기가 즐비하다. 이 후기를 접함으로써 다양한 음식을 접할 수 있으며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특별한 경험을 얻고 싶어하고, 안전성까지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타인들에게는 기꺼이 과해보일 수 있는 식비를 투자하고, 특별한 기념일이나 다양한 경험을 얻고자 하는 날에 오마카세나 다이닝을 방문하는 것이 여러 번 다른 식당을 방문하는 것보다 오히려 가성비가 좋고 합당한 소비가 아닐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비슷한 형식의 식당이 늘어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변하는 상황, 식비를 겨냥한 긴축재정 그렇게 비싼 곳을 방문하는 것도 오히려 가성비가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경험에 중독이 되기 시작했다. 오마카세를 방문하면 할수록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 한 단계 높은 오마카세를 방문하거나 파인 다이닝을 가기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병에 20만원 하는 와인을 6명이랑 나누어 두 잔을 먹은 날이었다. '좀 맛있는 거 먹어봤네' 라는 생각을 하고선 집에 돌아와 가계부를 보기 시작했다. 내 수입에 걸맞지 않게 한 끼에 과다한 지출을 하고, 그 지출을 해도 그리 큰 감흥을 얻지 않는 내가 보였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외식 시장은 크게 상황이 달라지고 있었다. 즐겨찾던 단골 술집은 몇천 원씩 안주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무지출 챌린지가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월세는 자연스럽게 오르고 있었고, 식량난으로 인하여 식용유, 밀 같은 재료값이 급격히 올랐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재료비는 더욱 상승에 박차를 가하고, 인건비도 덩달아 올라갔다. 자원난으로 인하여 전기세, 가스비도 올라버린다. 근본적인 것들이 올랐으니, 이 가격들을 반영해야하는 외식비도 오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체감했다. 사람들은 요즘 들어 식비가 “증가했다”고 인식하고,[1] 대학생들은 식비를 생활비 중에서 제일 많이 지출하고 있다고 말하며 지출을 줄일 경우 가장 먼저 식비 및 외식비를 줄이겠다고 대답하고 있었다.[2] 과하게 사용하는 식비에 회의감을 품고 있었던 나도 그에 속했다. 운동을 시작하던 때와 맞물려 식단을 해나가며 본능적으로 식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달에 두 번 꼴로 방문하던 다이닝을 가지 않고, 약속을 제외하고는 바깥에서 외식을 하지 않는 생활방식으로 바꾸어나갔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밥솥에 전원을 켜고 노브랜드에서 육천 원짜리 1kg 냉동 닭가슴살을 사왔다. 즐겨 찾던 가게의 사장님들에게 왜 요즘 안 오시냐는 아쉬운 소리를 들으며, 일주일 동안 식비에 아무 것도 쓰지 않기도 했다. 밥 100g을 재서 먹고, 닭가슴살 150g을 김치와 곁들여 먹으며 식비를 줄이는 생활을 지속해나갔다. 이렇게 식비를 줄이며 식단을 하는 생활을 하다보면, 내가 과거에 겪은 경험이 저 멀리 아득하게 남아있고 그 생활을 포기해버린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헛되거나 무의미한 경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쓸 수 있는 재정 내에서 식사를 하고, 시장에서 이천 원짜리 부추를 사와 그간 먹으러 다녔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어떻게 더 맛있게 요리해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부추무침, 마제소바와 같은 다양한 요리를 해 먹는 일도 즐겁다. 그렇기에 운동의 목적인 체중감량을 달성한 후에도 여전히 이런 식단과 외식을 병행하는 방식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경험을 하고 판단해야 한다 자신의 현실적인 재정을 알고 있고, 넉넉함에도 라면 하나를 세 끼에 나누어 먹는 극단적인 무지출 챌린지를 하는 것은 궁상, 재정에 맞지 않게 무리해서 오마카세나 다이닝을 가는 것은 허세라고 타인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자기 자신이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이루어진 결실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 내 안에서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이니까. 한 끼에 이십만 원짜리 식사를 해보기도 했고, 일주일 내내 식비에 돈을 쓰지 않은 적도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식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든 그 나름의 경험을 얻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누군가 궁상이나 허세라고 하건 모든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 누구나 식비를 극단적으로 줄이려 시도해보고, 누구나 다이닝을 한 번쯤 시도해 보아야 한다. 단순히 며칠째 무지출이라는 글자를 보며 위안을 얻는 것보다는 한 번의 비싼 식사에서 얻는 종합적인 경험이 원동력이 될 수 있고, 늘상 먹던 좋은 식사보다 극단적으로 식비를 줄이면서 한 번 먹은 외식 한 끼가 큰 위안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던 사람은 식문화 어디에서든지 미식을 찾을 수 있고, 먹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미식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삼십만 원짜리 오마카세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삼천 원짜리 김밥을 여러 가게에서 사먹으며, 어떤 김밥집이 제일 맛있는지 아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 기저에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되, 그 경험에서 자신이 즐거웠던 것을 선택하는 것에 달려있다. [1] 심동준, "코로나가 바꾼 '청년 의·식·주'…옷값 줄고 식비 늘었다", 뉴시스, 2021. 01. 11., https://mobile.newsis.com/view.html?ar_id=NISX20210108_0001298677 (접속일: 2022. 10. 08.) [2] "대학생 월 평균 생활비 59만2천원, 5년전보다 약 22만원↑", 잡코리아, 2020. 12. 03., https://www.jobkorea.co.kr/goodjob/tip/view?News_No=18436 (접속일 2022.10.08.) 전지영(조형예술학과) 먹으러 다니며 느낀 점들을 써보았는데 이렇게 공유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모두들 맛있는 거 드세요!
시 부문 심사평
시 부문 심사평 최미숙 교수 (국어교육과) 올해 응모작의 창작 경향은 최근 몇 년 동안 보여준 경향에 비해 매우 다양해졌다. 일상, 사랑, 청춘, 이별, 슬픔, 죽음, 영원 등을 중심으로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성찰을 담은 시가 풍부해졌다.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시가 많아졌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런데 소재가 다양해지고 사유의 깊이도 깊어졌지만 그것을 시적 언어로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아쉬움을 보여주는 시가 많았다. 이 점은 앞으로도 ‘시’ 부문 응모에서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당선작으로는 <선광사2>를 선정했다. 절제의 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 직접 토로하지 않고 거리를 두면서 응시하고 있다. 이 시가 택한 슬픔을 견뎌내는 방식이다. 간결하면서도 응축된 표현을 통해 ‘슬픔의 견딤’에 독자도 함께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화자의 바람대로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우주와 지구의 거리만큼 슬픔도 멀어지면서 작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가작으로 <할아버지>를 선정했다. 이 시 역시 슬픔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그것은 할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던, “쓸모없는 것을 사랑”하던, “선량한” ‘할아버지’를 향한 화자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깊은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다만,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를 좀 더 응축시켜 표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부분이 향상된다면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입선으로 선정된 <10월 4일, 2022년>은 재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행간 걸림’의 사용, 호흡의 단속을 조절하는 문장 부호의 활용, 시행 배치의 변화를 통한 리듬의 변주 등 세련된 표현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다만,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사유를 담는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어 본다.
[시 당선] 선광사 2
선광사 2 사람 떠나는 일이 먼 슬픔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수억 광년 먼 곳의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는 침엽수와 물소 머리만 내밀고 걸어가는 복잡하고 뿌옇게 들썩거리는 인간 너무 사소해서 보이지 않는 나를 생각하면 모든 것은 지나갈 거라고 이찬영 (국어교육과) 선광사의 종소리가 들리던 제주도 남원에서 썼습니다. 종종 읽히는 글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 가작] 할아버지
할아버지 올해도 감나무가 등불을 켰습니다 정오면 그 밑에서 항상 커피를 마시던 당신은 저에겐 늘 식혜를 내어주었죠 이제 저는 자라서 당신처럼 커피를 마십니다 혼자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살 줄도 알고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들고 창밖을 보기도 합니다 쓸모없는 것을 사랑하고 그래서 편두통을 달고살았던 선량한 당신의 마음이 훼손될 실물도 없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여러겹의 기억을 거쳐야만 당신이 떠오르는건 겨울날 볕뉘에 마음이 사그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슬픔은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꼭 등불을 켜며 오곤 하니 나는 새 이마를 들고 또 흰 제비꽃이 피어나는 봄을 찾으러 떠납니다 봄의 끝에서 당신에게로 무너져내리고 싶습니다 최민제 (글로벌경영학과) 여러 겹의 기억을 거쳐서라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어쩌면 인생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빠르게 범람되고 해체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움의 감정은 하나의 사치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학우분들이 삶의 순간을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그리움의 사치를 골몰할 수 있길 바랍니다. 내실이 부족한 저의 글에 상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시 입선] <10월 4일, 2022년>
<10월 4일, 2022년> 돌이켜보면 편지에 계절 안부를 물으며 따뜻한 하루 되세요, 하던 게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가 되고 다시 따뜻한 하루하루 보내시길!이 된 이 시간들이 사랑이었던 것 같애. 사랑은 꼬박꼬박. 꼬박꼬박은 사랑. 꼬박꼬박은 다정. 다정은 사랑./ 지난 주에 공연을 보고 와서 국밥집에 갔는데 청양고추를 먹었더니 눈물이 맺히다가 주룩, 흐른 거야. 그것도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근데 앞 테이블에 사람이 있었어) 그래서 약간.. 살면서도 커지고 부푼 마음을 어떻게라도 톡, 터뜨려줄 것이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어. 넘치는 마음이 내 안을 채우다 못해 짓누르기 전에 톡. 진초록 필사모임을 꾸리다 문득. 내 사랑은 무슨 색일까? 권서연 (교육학과) 어느 9월, 누군가에게 이런 문장을 선물 받았습니다. '절제하다 사라져버리는 능력, 하지 않으면 지워지는 언어, 아끼면 사랑은 불능이 된다.' 박연준 작가님의 '표현의 중요성'이란 글의 한 구절인데 제 삶에 가득했을 사랑이 언젠가 잊혀질 게 두려워져 그날부터 꾸준히 하루하루의 사랑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입선작도 그중 하나인데 사실상 '시'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짧은 일기에 지나지 않는 글이라 쑥스러운 마음이 더 큽니다. 제 글의 주인공인 꼬박꼬박이 사랑임을 가르쳐주었던, 얼토당토않은 편지를 1년 동안 받았을 한 모 밴드맨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를 빌려 짧게나마 한 학기 열심히 달려온 쿠레레 다람쥐들에게도 고생했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모두 자주 사랑하고 사랑받는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논문 부문 심사평
논문 부문 심사평 김미형 교수 (한국언어문화전공) 이번 학술상 논문 응모작은 모두 9편이었다. 이 중 2편은 분량 미달이라 심사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1편은 중복 게재여서 뽑을 수가 없었고, 2편은 기존의 상황을 잘 정리하는 것에서 그쳐 논문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청소년의 통신언어 사용 양상과 발전 방향에 대한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어른의 관점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보았던 청소년의 통신언어 사용 문제를 청소년의 입장에 서서 분석하기 위해, 청소년 14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하여 사용 동기와 생각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통신언어의 긍정적 발전을 위해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의 다각적 요소가 참여해야 함을 제언한 논문이다. 창의적 논지가 있고 문장과 구성 체계도 잘 되었다. 다만 이 논문에서 새롭게 주장하는 내용의 논지 전개력이 살짝 부족하다고 보았다. 현상에 대한 분석과 문제점 제기 및 개선 방향의 논점을 명확히 구분하여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소 미흡함이 있더라도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새롭게 접근하며 대안을 제시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정했다. 선정에 들지 못한 ‘비판적 문화지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성 비판 -인천 송월동 동화마을을 사례로-’는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조사하고 열심히 쓴 논문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주장에 대한 논거 제시를 충분히 하지 못해 논리상 결함이 있다고 보았다. 이 논문은 연구자가 연구 대상이 되는 지역에 대해 개발 당시의 상황, 진행 과정 등 실내 조사를 하고 마을 주민 7명을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묻는 현장 조사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참신한 연구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논점이 객관적인가, 즉 연구 대상을 분석하는 데 사용한 이론이 이 논문의 연구 대상에 들어맞는가 하는 점에서 미흡함이 보였다. 비판적 문화지리학은 문화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여 기득권 세력을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기술했는데, 이 마을의 새로운 조성은 공익 추구라는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대로 적용을 하려 했다. 현재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은 운영을 결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텐데 결과가 안 좋다고 하여 이것을 구청장의 치적 쌓기로 간주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될 여지가 있다. 낙후된 환경을 새로운 조성으로 탈바꿈시킨 상황을, 빈곤의 경관을 이용하여 사업을 관철시키고 동화마을이라는 새로운 문화경관으로 조성한 문화정치의 행태라고 단정하는 것도 설득력이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 논문에서는 주장된 것이 많으나, 그 주장을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논거가 필요하다고 본다(아쉽게도 선정되지 못한 작품이기에 더 길게 설명함). 가작으로 정한 것은 ‘eDNA를 활용한 홍제천 생물 다양성 평가’이다. 외국어 노출이 많았는데, 전문용어라도 한국어로 적고 원어는 괄호 안에 적어야 한다. 마무리 부분에서 미흡함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논문, ‘급식산업에서 조직 구성원의 성격이 조직성과에 미치는 영향: Big 5 성격특성을 중심으로’을 입선으로 정한다. 이 논문은 논지 전개를 부분적으로 잘하다가 중반 이후와 마무리가 미흡했다. 예를 들어, ‘빅5’가 이 논문에서 중요 개념인데 따로 구분하여 드러내지 않았고, 산업 분야 사례에서는 MBTI 설명으로 시작하여 논점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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