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입선]Thorny heart
[사진 입선]Thorny heart 김서현(디자인학부)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취미로 소소하게 찍고 있어 어딘가에 제출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입상이라는 좋은 결과를 얻게되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Thorny heart라는 제목은 삶의 도전 중 날카로운 순간들로 인해 마음이 가시처럼 변하지만 그 속에서 강인함을 발견한다는 의미를 담아 지어보았습니다. 많이 부족한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인사 드리고 싶습니다.
[시 부문 심사평]
[시 부문 심사평] 이번 제50회 상명 학술상 시 부문에 접수된 작품은 22명의 시 132편에 달했다. 투고편수도 늘어났고, 작품 또한 매우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어 인상적이었다. 몇몇 시는 발상이 참신하기도 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다양한 현재적 감정과 고민을 담아내고 있어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삶과 사랑,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았다. 많은 시들이 진솔한 마음과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어 울림을 주었고, 시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긍정적으로 읽었다. 그러나 시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구성의 밀도가 떨어지는 시들, 다루는 대상이나 주제에 대한 시인의 고유한 직관이나 자기만의 통찰이 부족한 시들은 아쉬움을 느끼게 했다. 시는 자신의 안에서 끌어낸 정서와 내밀한 생각, 경험 등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친 감정의 토로, 하소연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시는 산문에 비해 짧고 압축적이기 때문에 언어적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나 관습적인 비유를 주의하고 자신만의 시적 개성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고심 끝에 「소나기」를 당선작으로 결정하고 「내가 겨누었던 화살 끝」을 가작으로, 「언니에게」를 입선작으로 선정했다. 「소나기」는 실제의 소나기를 노래한다기보다, 내면의 강렬한 격동을 ‘소나기’로 비유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작품으로 시적 깊이나 완성도를 확보하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비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실제로 응시하는 것은 그저 잔물결일 뿐이다. 그 안에 들끓는 격랑을 바라보는 것은 시적화자의 또 다른 마음의 눈이다. 고요하고 무기력한 일상은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먹구름이 낀 흑백의 필름”처럼 생동감을 잃어가는 삶 속에서 그리움도 아름다움도 희미해져간다. “얼굴도 잊은 사람을 그리워할 수” 없는 일이다. “멜로디만 남긴 노래의 가사는 무엇이었나”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나기”는 시적화자를 변화시킨다. 시적화자는 망각하고, 외면하며 무감각한 평화로움을 얻기보다는 차라리 폭우와 흙탕물, 거센 물결 속에 쓸려가는 쪽을 택한다. “빗물에 무감하던 그 눈동자는/ 이제 맑은 날 여우비에도 흐트러져” 버린다. 거센 소나기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나서, “비가 남기는 물 자국이 깊게 패인” 후에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도 그 이전의 삶과는 달라져 있다. “발이 땅에 닿”고, 해는 중천에 뜬 도로 위에서 문득 그는 깨닫는다. “비는 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모든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는 “젖은 소매가 자꾸만 손가락 끝에 스”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다시금 앞을 바라보고,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이 시의 “소나기”는 청춘, 방황, 열정, 상실, 내적 성장에 대한 매혹적인 비유로 읽힌다. 가작으로 선정한 「내가 겨누었던 화살 끝」은 짧지만 관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끌었다.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처럼 소모적이고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고 파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상대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독 묻은 가시와 같”은 화살이 “나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음에도, “네가 겨누었던 화살”이 결국엔 “내가 나에게 겨눈 화살 끝”이었음을 깨달음에 도달하며 삶의 아이러니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양쪽이 모두 원인인 동시에 결과가 되기도 하는 복잡하고 양면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을 시적으로 잘 담아낸 점이 값졌다. 입선작으로 결정한 「언니에게」는 사실 그 뒤에 이어지는 시들과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작품으로, 연작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중 한편을 골라 선정해야했기 때문에 단독으로도 어느 정도 완결성을 가질 수 있는 「언니에게」를 선택했다. “새벽 담은 강물에 적어둔 편지를 빨았”다는 구절 등 시적 비유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능력이 돋보이고 인간관계를 시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방식도 독특하다. 언어적 긴장과 감정의 절제, 통찰의 깊이가 조금 더 확보된다면 향후 좋은 시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그 외에도 마지막까지 고려 대상에 있었으나 아쉽게 최종 선정되지 못한 좋은 작품으로 「떨어진 마음을 집어 올린 가난한 주문들」, 「미물」, 「겨울 마음」 이 있었음을 밝힌다. 선정된 학생들에게 축하를 보내고, 그 외 참여해준 모든 학생들에게 진심어린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한국언어문화전공 김지윤 교수
[시 당선]소나기
[시 당선] <소나기> 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들 한 쌍의 눈동자가 내려다보았던 건 허우적대는 것들이 아닌 잔물결 어느 날 눈동자에 비친 소나기 먹구름이 낀 흑백의 필름 장대비 너머 흐릿한 마지막 천둥이 끊어내 버린 콧노래 빗물에 무감하던 그 눈동자는 이젠 맑은 날 여우비에도 흐트러져 향하던 곳은 어떤 색을 띄고 있었나 얼굴도 잊은 사람을 그리워할 수가 있던가 멜로디만 남긴 노래의 가사는 무엇이었나 비에 쓸려가며 발버둥 친다 불어난 강 흙탕물 속 이물질들 축축한 옷 비는 사람을 잡아먹는다 비가 남기는 물 자국이 깊게 패인다 발이 땅에 닿는다 해는 중천 도로 위 사람들 더운 바람 비는 온 적이 없었다 비가 온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금 앞을 바라보는 눈동자 젖은 소매가 자꾸만 손가락 끝에 스쳤다. 이은빈(한국언어문화전공) 안녕하세요, 한국언어문화전공 20학번 이은빈입니다. 저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졸업을 앞둔 4학년입니다. 사실 학보에 저의 시를 한 번 실어보고 졸업하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당선이 되었다니 매우 영광이며 기쁩니다. 상명대에서의 4년은 정말 행복했고 많은 경험을 했기에 소중한 기억을 많이 안은 채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기대했던 대학 생활이 1년간 집에서 싸강 듣기로 대체되어 제대로 된 학교생활은 3학년부터 시작해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지만, 좋은 추억이 많으니 웃으며 졸업하겠습니다. 그리고 20살 1학년 때만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기 두려워하던 제가 학술상 수상을 하기까지 저희 과 동아리 ‘해울’의 도움이 정말 컸다고 생각합니다. 3년간 문학을 좋아하는 동기들과 후배들과 함께 서로의 글을 합평하고 동아리 과제를 하며 글에 대한 애정, 뜻을 계속해서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글태기도 왔었고 확신도 없었던 부족한 제 글을 항상 진심으로 읽어준 해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졸업 후에도 계속해서 저만의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제가 글을 놓지 않게 도와준 친구들, 교수님들, 지인들, 상명대 전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작 생활을 함께했고 매일 붙어있었던, 같이 졸업하는 우리 동기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는데 곧 다들 사회로 흩어진다는 게 믿기지 않네. 당신들과 함께여서 내 대학 생활이 빛날 수 있었다ㅎㅎ. 다들 어떤 길로 가든지 항상 응원할게. 졸업하고도 꼭 연락하고 계속 봅시다 고마웠어!
[시 입선]언니에게
[시 입선] <언니에게> 우는 날이 부쩍 늘었다고 이야기했던가 새벽 담은 강물에 적어둔 편지를 빨았거든 아마 누군 가의 눈물이었을지도 몰라 운도를 타고 흐르는 오탈자는 전부 미련이었어 종이에 남은 글자들 이 굴절되며 유리병 속으로 들어갈 때 지르던 아우성은 내 울음이었지 아마 누군가는 절삭된 악몽을 감정하고 있었을 거야 언니에게 반송된 유언에 추신이 달려있었나 우체함에 들어있던 지전이 발목을 잡았나 아케론 을 건너던 카론이 생사부를 찢어건넸어 내 이름을 삼킨 언니 눈 꼭 감고 나를 끌었댔지 그때 부터 나에게는 부레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을까 명왕성 저편을 느릿하게 헤엄치는 동안 내 이 름은 언니가 되었거든 우리 기원으로 돌아가자 별자리를 타고 들어간 양수가 미지근했다며 포궁 속 튤립 줄기에 우 리 둘 손가락을 엮었던 일을 기억해? 꽃잎을 삼킨 이유는 내생에서 언니가 유영할 품이 되고 싶었기 때문 이민영(글로벌지역학부) 아무것도 몰랐던 학창시절에 몰래 적었던 일기 같은 글이었는데 감사합니다 :)
[시 가작]내가 겨누었던 화살 끝
[시 가작] <내가 겨누었던 화살 끝> 너의 화살촉이 가닿은 자리는 언제나 명민하고 명쾌했지 멀리서 지켜만 봐도 심장에 피가 치솟는 열감이었으니 그러나 그 화살은 독 묻은 가시와 같아 나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네 네가 겨누었던 화살 결국엔 내가 나에게 겨눈 화살 끝 김도현(영어교육과) 아플 것을 알면서도 내 심장이 이끄는 대로 가시에 찔리는 나날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은 가진 것에 감사하고 싶어요. 여러분도 포근하고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소설 부문 심사평]
[소설 부문 심사평] 글이 사라지는 시대, 글보다는 영상으로 모든 정보를 수용하는 시대에 글을 쓴다는 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올해 선자에게 넘어온 소설은 총 8편이었다. 10편이 안 되는 작품을 놓고 투고율이 저조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아직도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쓰고자하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응모작을 살펴보았다. 그중 분량이나 문학적 형상화 등 소설로서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품들을 제외하고 「직선으로」를 가작으로, 「힘들 땐 쉬세요」를 입선으로 선했다. 「직선으로」는 사고로 남자친구인 재영을 잃은 소희가 상실감의 고통으로 삶에 대한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에 그들의 추억이 어린 명동의 떡볶이 집을 찾고, 그곳에서 과거 재영이가 남겨 놓은 편지를 보고 새롭게 삶의 의미를 다진다는 내용이다. 사고로 남자 친구를 잃고,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삶의 마감을 고민하고, 추억의 장소에서 고인이 남긴 편지를 보고 삶의 의지를 다진다는 내용은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한 클리셰이지만 소설적 구성을 갖춘 작품이어서 격려의 의미로 가작에 선한다. 「힘들 땐 쉬세요」는 권력서열에서 밀려난 조폭의 이야기이다. 전형적인 조폭인 나가 기업가마인드인 조폭 영수에게 밀려나 몇몇의 부하들과 속초에 갔다가 조직원 중 한명이 익사하면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응모작들 중 가장 매끄럽게 이야기를 서술해나간 솜씨가 돋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조폭을 소재로 한 서사가 지나치게 진부하고 그 조폭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더욱이 조폭이라는 소재가 글쓴이의 경험의 영역을 다룬 것이 아닌 까닭에 나타나는 피상적인 서술이 아쉽지만 나의 심리나 글을 서술해나가는 솜씨가 좋아 분발의 의미에서 입선에 선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무엇을 쓰고자 하는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만들고 구조적인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에 선하지는 못한 몇 몇의 작품들은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해본다면 다음에는 의미있는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어교육과 강옥희 교수
[소설 입선]힘들 땐 쉬세요
[소설 입선]힘들 땐 쉬세요 부쩍 화가 많아졌다. 작은 일에 신경질이 나고, 참기 어렵다. 두목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웃음이 많아진다고 했다. 그러니 함부로 웃지 말라고 했다. 죽기 싫으면. 辛い時は休みます. 사무실 벽면에 못 보던 액자가 걸려있었다. 이곳에 내 허락 없이 무언가가 들어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누가 걸어놨는지, 언제 걸어놨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어 할 줄 아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못 들은 척 담배만 피우고 있다. 주먹이 나갈 뻔했다. 확실히 요즘 화가 많아졌다. 내 문신에도 일본어가 적혀있다. 두목이 하라는 대로 한 거라 뜻은 모른다. 두목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본어 문신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혹시 ‘저는 바보입니다.’ 같은 문장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설마 문신에 그런 장난을 칠까 싶었지만, 두목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목은 재밌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재밌는 일이 없다. 십 년 전에는 뭘 해도 재밌었다. 젊은 시절에 지금의 즐거움까지 전부 당겨 쓴 것이 아닐까. 종종 우울해진다. -갱년기가 온 건 아닐까요? 요즘 부하들은 이런 식이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선배에게 저런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부하들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젊음을 논하는 건 늙었다는 증거다. 나도 안다. 나는 늙고 병들었다. 두목은 지금의 나보다 늙고 병든 상태였다. 두목은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좋은 사람은 그냥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다. 두목은 나를 싫어했지만, 능력은 인정했다. 두목은 내가 이유 없이 밉다고 했다. 내가 두목을 두목으로 불러서 일수도 있다. -두목은 너무 깡패 같잖아. 깡패 맞으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것도 벌써 15년 전 일이다. 두목은 죽었지만 나는 살았다. 나는 두목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나를 따르는 몇 명이 있다. 건방지지만 뭐라 하지 않는다. -내가 왜 너를 똘마니로 두는 줄 알아? 언젠가 두목이 그렇게 물은 적 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두목은 답을 알려주지 않고 죽었다. 액사였다. 누군가 목을 조른 흔적이 발견됐다. 두목의 목에서 지문과 DNA를 추출했지만, 범인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의심 가는 사람은 몇 있다. 두목의 죽음으로 이득을 본 사람이 많다. 나는 아니다. 나는 두목이 죽은 후 두목이 되지 못했다. 구태여 그 자리에 오르려고 지금까지 버틴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놓고 모른 척한 건 좀 서운하다. 두목이 된 건 영수다. 영수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수는 이런 일을 하기에 너무 반듯한 이름이다. 영수는 영수라 불리는 걸 싫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영수라고 부른다. 영수는 나를 싫어한다. 상관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속초로 가야 하는 건 영수가 나를 싫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내가 영수를 싫어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영수가 그냥 싫다. 말투도 마음에 안 들고 행동도 마음에 안 든다. 제대로 일 처리를 해본 적도 없고, 두목이랑 같이 있던 시간도 짧다. -그건 그냥 싫은 게 아닙니다. 언젠가 부하들에게 말하자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히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 영수가 나를 속초로 보낼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두목은 항상 자신을 바다 사나이라고 했다. 두목이 수영하는 걸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을 바다에 빠트리는 걸 좋아하긴 했다. 두목이 바다에 빠트린 사람만 15명이 넘는다. 그들은 모두 죽은 상태로 바다에 던져졌다. -쟤 수영 잘한다더니 못하네? 두목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낄낄댔다. 나는 그런 농담에 웃어주지 않았지만, 두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댔다. 두목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두목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눈치챘어야 했다. 시체를 그냥 바다에 던지면 곤란하다. 내장에 차는 가스 때문에 수면 위로 떠 오른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배를 가르고 바다에 던진다. 배를 가르는 건 내 몫이었다. 너무 오래돼서 과정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비린내가 역했던 건 기억난다. 아직도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비가 오면 그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때가 좋았지. 냄새를 맡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인데. 나도 모르는 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것 같다. 부하들이 속초로 따라오겠다고 했다. 부하들의 말투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혼자 가겠다고 했다. 부하들은 알았다고 했다. 나도 안다. 나는 썩은 동아줄이다. 그래서 슬금슬금 눈치 보며 영수의 동아줄로 옮겨 가는 놈들도 밉지는 않다. 그래도 두 번 묻는 부하들이 없다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화가 많아짐과 동시에 눈물도 많아졌다. 얼마 전에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맥주를 먹어서인지 감정이 훅 올라왔다. 사나이답게 눈물을 닦았지만, 애석하게도 콧물은 미처 막지 못했다. 덕분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코를 훌쩍여야 했다. 같이 영화를 보던 부하들은 내가 비염에 걸린 줄 알고 감기약을 사오겠다고 했다. 아무리 깡패들이라지만 너무 둔한 거 아닌가 싶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우는 걸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을 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동이다. -잠깐 쉬다 온다고 생각하십시오. 영수 따까리가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쉬라, 마라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성질이라도 부려볼까 했지만 그만뒀다. 화낸다고 달라질 게 없기도 하고, 또 그다지 화가 나지도 않았다. 맞는 말 아닌가? 잠깐 쉬다 오지 뭐. 문제는 어떻게 내려가느냐였다. 이십 대 이후로 운전기사 없이 어디 가본 적이 없었다. 뒷좌석 말고 타본 적이 없다. 차도 내 소유가 아니다. 두목 때까지만 해도 차는 타고 다니는 사람 소유였는데, 영수가 부임한 이후로 차는 전부 조직 소유였다. 영수는 예전부터 우리가 하나의 기업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녀석은 깡패보다는 비즈니스 맨이다. 말쑥한 정장을 입고, 비싼 금시계 같은 걸 차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영수는 나랑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이 세계도 힘보다는 머리라고 했었다. 그때는 자기가 힘이 약하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내 머리가 나쁘다는 걸 돌려 말한 거였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영수한테 차를 가지고 가도 되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사무실에서 짐을 쌌다. 부하들은 소파에 앉아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분노인지 우울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진짜… 아무도 갈 생각 없냐? 다들 멀뚱히 나를 쳐다보다가 기운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뒷모습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괜히 미안해졌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야유회에 억지로 끌고 가는 부장이 된 기분이 이럴까. 조직을 기업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영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막상 차에 올라타니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여행가는 느낌도 나고 그랬다. 처음에는 가기 싫어하던 부하들도 왠지 다들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내려가는 인원은 나까지 총 넷이었다. 이 차 안에 네 명이 탄 적은 없다. 우선 뒷좌석에 누군가와 같이 타본 적이 없다. -좀만 문 쪽으로 붙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형님.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 건지 어이없어서 웃는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뒷좌석에 세 명이 앉기엔 생각보다 자리가 좁았다. 그냥 앞에 앉을 걸 그랬다. -가서 뭐 하실 겁니까? 떡대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웃는 낯이라 그런지 왠지 밉지 않았다. 다들 가스라도 흡입한 사람처럼 바람 빠지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그냥 담근 거 아닙니까? 유일하게 웃음기 없던 벽돌이 말했다. 속초에 다른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긴 했다. 속초 가서 할 일이 있다는 영수의 말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다. 혹시 그 할 일이라는 게 수영은 아닐까. 속초는 생각보다 더웠다. 도착한 역전에는 사람이 붐볐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남쪽이라 그런가. 한국이 아무리 좁다 해도 위와 아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벽돌이 영수 따까리한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부하들과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냈다. -정말로 가서 뭘 하라고도 안 알려줬습니까? 떡대가 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부하들이 드디어 미친 건가 싶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떡대는 열이 올라왔는지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숙소 주소 받아왔습니다. 벽돌이 말했다. 숙소는 남자 넷이 머물기엔 좀 좁았다. 부하들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칼, 망치, 빠루 같은 무기부터 컵라면, 휴지, 물티슈 같은 생필품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도대체 속초에 뭘 하러 온다고 생각했던 걸까. 이런 데 올 때 필요한 건 지갑이지 멍청이들아. 내가 낄낄대자, 다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막내가 짐을 풀 때는 분위기가 제법 험악해졌다. 막내는 가방부터 깡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알록달록한 가방에 포켓몬 스티커가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신경을 거스르는 건 가방 안의 내용물이었다. -물총은 왜 챙겨왔냐? 벽돌이 발로 막내의 머리를 밀었다. 막내는 바닥으로 엎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발이 배에 닿는 타격음과 막내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번갈아 들렸다. 쿵짝쿵짝. 리듬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엇박처럼 들리기도 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 소리들이 명상 음악처럼 느껴졌다. 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 수도꼭지를 안으로 넣었다. 수돗물이 싱크대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냥 웃었다. 웃음이 계속 삐져나왔다. 벽돌은 여전히 화가 덜 풀린 채 씩씩거렸다. 막내는 신음을 뱉고 있었고, 나머지는 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여기는 너무 덥다. 더운 것도 더운 건데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었다. 이렇게 보니 영수에게 밀려난 게 실감 났다. 너무 더워서 바다에라도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물총 안에 물이 다 찼다. 벽돌은 아직도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설마 자기한테 쏘겠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아쇠를 당기자, 벽돌의 얼굴로 물줄기가 뻗었다. 벽돌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너무 구겨져서, 웃는 건지 화난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녀석이 손을 휘적거리며 물줄기를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물총은 계속 벽돌의 얼굴이 향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아. 진짜 그만하십쇼. 벽돌한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다른 녀석들의 입꼬리도 들썩거리는 게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여행이라도 온 것 같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벽돌이 모든 걸 포기한 표정으로 물을 맞으며 말했다. 물총을 멈추고 내가 왜 이러는지 생각했다. -재밌잖아. 속초의 온도는 35도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한참 마루에 엎어져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습기였다. 심지어 거구의 장정들이 내뿜는 숨 때문에 숙소 안의 공기가 습식 사우나와 버금갈 정도였다. 영수 이 자식. 우리를 쪄 죽일 목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제가 선풍기라도 사오겠습니다. 막내가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 원짜리를 두 개 꺼내려다, 그냥 카드를 쥐여줬다. 벽돌이 나가는 막내에게 한 마디 거들었다. -올 때 아이스크림. 막내가 인사를 꾸벅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막내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던 우리도, 의지를 잃고 바닥에 쓰러져만 있었다. 해가 지고도 꽤 시간이 지났을 때쯤 밖에서 뭔가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모두 심신미약 상태라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막내가 돌아왔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다음 들린 것은 낑낑거리는 신음이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이 들었다. 내가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막내보다 먼저 눈에 보인 건 선풍기라고 부르기에 너무 거대한 크기의 선풍기였다. 화가 나지 않았다. 너무 더워서 맛이 간 걸까. 웃음이 나왔다. 별일이 다 있구나. 내 웃음소리에 부하들이 뛰쳐나왔다. 막내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일단 막내를 자리에 앉히고 떡대와 벽돌이 선풍기를 들어 올렸다. 선풍기는 두께와 너비 모두 거대했다. 어떤 각도로 돌려도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부하들의 표정에서 짜증이 솟았다. 막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손에 검정 봉투가 들려있었다. 떡대가 선풍기를 던져놓고 검정 봉투를 뺏어 바닥으로 탈탈 털었다. 검정 봉투 안에서 쏟아진 건 바밤바였다. 벽돌의 표정이 아까처럼 구겨졌다. -장난하냐? 막내의 긴장된 얼굴에 주먹이 날아갔다. 벽돌은 쓰러진 막내를 계속 발로 밟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떡대와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다들 이미 몸속의 땀을 전부 배출한 탓에 얼굴이 푸석해져 있었다. 나는 바밤바를 한 집어 들어 봉지를 깠다. 이거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는데. 기왕이면 메로나가 좋지만, 속초의 맑은 공기가 마음을 정화한 탓인지 바밤바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한입 베어 물자 고소한 밤 향기가 났다. -맛있다 이거. 벽돌과 떡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막내도 가드 올린 팔을 내리고 슬그머니 눈을 떴다. 부하들은 주섬주섬 옷을 털고 내 앞에 쏟아진 바밤바를 하나씩 챙겨가 입 안으로 넣었다. 밖으로 나오니 의외로 시원했다. 바닷바람이 불었고,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려왔다. 해가 지니 이곳도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바다나 보러 갈까. -…좋습니다. 벽돌도 막상 입에 아이스크림이 들어가니 흥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 - 12 - 다. 진작 나와 있을걸. 선풍기로는 낼 수 없는 개운하고 말끔한 공기가 녹아내릴 뻔했던 뇌를 시원하게 청소해주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이었나. 스스로 생각하고도 놀랐다. 아무래도 갱년기가 맞는 것 같다. 종일 땀을 배출했던 탓인지, 숙소의 밤은 의외로 편안했다. 단점이 있다면 모기가 날아다닌다는 것이었다. 공기 맑은 곳이라 그런지 덩치도 컸다. 물론 밤새 막내가 모기를 내쫓은 덕분에 우리의 밤은 편안했다. 막내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벽돌은 아침부터 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원하던 대답은 아닌 것 같다. -일단 대기하랍니다. 내가 통화 내용을 묻자 벽돌이 그렇게 답했다. 벽돌이 통화한 사람은 영수 따까리였다. 떡대는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었다. 너무 더워서 아무 잡념 없이 멍하니 있었다. -바다나 보러 갈까? 다들 눈만 꿈뻑거렸다. 내가 옷을 주섬주섬 꺼내자 부하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막내는 가까우면서 경치가 좋은 해변이 어디인지 검색했다. 나는 물총을 들고 쏘는 시늉을 했다. 벽돌이 옷을 찾다 말고 움찔했다. 차는 여전히 좁았다. 막내는 뭐가 기분이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벽돌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막내의 얼굴을 때릴 것 같았지만, 아무튼 내색은 안 하고 있었다. 차 안은 숙소보다 더웠다. 금세 우리가 내뿜은 이산화탄소로 가득 찼다. 막내가 에어컨이 고장난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벽돌이 거짓말이면 죽인다고 막내를 협박했다. 에어컨 통풍구에선 진짜 바람이 나오고 있긴 했다. 따뜻한 바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문제없었는데 갑자기 고장이 난 듯했다. 오랜만에 장거리 주행을 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바밤바 남은 거 있냐. 벽돌이 막내에게 물었다. 막내는 어제 다 먹었다고 답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막내는 입을 달싹거렸다. -바밤바 그래도 먹을 만하지 않았습니까? -닥쳐.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오는 건 땀방울밖에 없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막내는 여전히 실실거렸다. 100kg은 우습게 넘는 덩치들이 좁은 차 안에서 호흡곤란에 빠진 상황을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 해수욕장은 고요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만 들렸다. 사람이 많기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사람이 없을 줄은 몰랐다. 속초 해수욕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끝없이 길게 뻗은 모래사장 위에 거구의 남자 넷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잠시 침묵했다. 뭘 하러 왔더라. 우리는 바다를 보러 왔었다. 바다를 보긴 했지만 뭔가 충족되지 못한 느낌이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을 해수욕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총 가져왔냐. 벽돌이 고개를 끄덕였다. -꺼내. 해가 뜨거웠다. 다들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눈 밑이 짙게 물들었다. 벽돌이 먼저 신발을 벗고 바다로 달렸다. 벽돌이 막내에게 손짓하자 막내도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따라나섰다. 나는 그냥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정장 바지 아래로 모래 알갱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모래사장 위에 자리를 잡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따 털고 앉으셔야 됩니다. 떡대가 옆자리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맥주만 있으면 정말 완벽하겠는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막내를 시켜려다가 말았다. 막내에게는 일을 맡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벽돌과 막내는 벌써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벽돌이 모래사장 위에서 씨름인지 레슬링인지 모를 기술을 시전했고, 막내는 계속 넘어졌다. 퍽. 퍽. 모래사장에 머리가 박히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명상 음악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다. 평화롭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난 산보다 바다가 좋은 사람이야. 두목도 바다를 좋아했다. 언젠가 무게를 잡고 말하길래 못 들은 척했다. 원래 저런 말 하던 양반이 아닌데 말이다. 갱년기가 왔나 싶었다.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는 걸 안건 나중이었다. 두목이 박해일이랑 탕웨이가 나오는 멜로 영화에 이입했다는 게 좀 징그럽게 느껴졌다. 두목은 박해일 보다는 박상면이랑 더 닮았다. 두목은 바다를 좋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빠트린 걸까? 모르겠다. 나도 바다가 좋다. 시원하고, 비린내와 푸른색 파도도 마음에 든다. 부하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재밌게 놀고 있다. 웃통을 다 깠고, 물에서 목만 내놓고 있다. -안 들어오십니까? 나는 손만 흔들었다. 몸을 적시긴 싫었다. 햇빛만 맞고 있어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서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잠이 올 것도 같았다. 모래 위에 누우니 까슬한 촉감이 느껴졌다. 할머니 베개를 벤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제 더워서 채우지 못한 잠이나 마저 잘 심산이었다. 선글라스를 꺼내 썼을 때쯤, 바다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려고 했는데, 점점 소리가 커지더니 종국에는 비명처럼 들렸다. -뭐해! 소리 질렀지만, 해안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막내가 바다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잘 놀고 있다는 건가 싶어 다시 누우려고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막내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벽돌과 떡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내던지며 해변으로 달렸다. -뭐하냐고! 내가 벽돌과 떡대의 근처까지 가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그제서야 들은 체를 했다. 둘 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바다의 빛이 얼굴에 반사되어 더욱 새파랬다. 떡대가 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어버버 대는 탓에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막내가 있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막내가 손을 흔든 건 인사를 하려던 게 아니었다. 조류에 휩쓸린 것 같았다. -어쩌냐. 벽돌과 떡대를 번갈아 봤다. 둘 다 고개를 푹 내리고 있어서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와 비슷한 표정일 것 같았다. 막내는 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소용돌이에 빨려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근처에 워낙 사람이 없던 터라, 안전요원도 튜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급박한 상황에 다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어부어부어부어부… 막내는 코와 입만 내놓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저기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지만, 막상 구하러 들어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00kg이 넘으면 수영은 고사하고 몸을 물에 띄우는 것도 어렵다. -어쩔 거냐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벽돌은 윗옷을 벗어 던졌다. 떡대도 눈치를 보다가 밍기적 옷을 벗었다. 벽돌이 나를 힐긋 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떡대는 몸에 꽉 끼는 옷을 아직도 벗는 중이었다. 막내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머리까지 가라앉았다가 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와 다시 첨벙거리더니 몇 번 지나고 나서는 올라오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벽돌은 막내가 있는 곳으로 열심히 팔다리를 저었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발을 열심히 굴리는 것에 비해 속도가 너무 느렸다. 파도 때문에 뒤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벽돌이 바다와 막내 사이 삼 분의 일 지점 정도에 도달했을 때 떡대도 드디어 탈의를 마쳤다. 그대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발만 살짝 담그고 다시 나왔다. 그러고는 헛둘헛둘, 구령까지 넣어가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죽을래? 내 목소리에 떡대가 고개를 돌렸다. -물이 너무 차갑습니다. 형님. 내가 정색하자, 떡대는 주눅 든 표정으로 바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뭐라 투덜대는 것 같았지만 못 들은 척했다. 벽돌은 어느새 절반까지 가 있었다. 떡대도 바다에 몸을 던졌다. 떡대는 벽돌보다 더 느렸다. 나름대로 팔은 열심히 휘젓는 것 같은데 속도가 전혀 나지 않았다. 조금씩 전진할 때마다 파도에 휩쓸려 해변으로 다시 쓸려왔다. 몇 번이고 해변으로 밀려오자, 발이 닿는 데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물이 목까지 차오르는 곳까지 도달해서야 수영을 시작했다. 떡대도 물에 뜨는 법 정도는 아는 듯했다. 벽돌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막내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다. 벽돌이 막내에게 닿을 즈음, 떡대도 절반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의외로 물에 뜨는 데는 능숙한 것 같았다. 막내는 거의 가라앉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그건 수영이라기보다는 헤엄에 가까웠다.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젓는 것치고는 간신히 물에 뜨는 정도였다. 저러다 같이 휩쓸리지는 않을까.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세 남자가 바다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벽돌이 막내를 따라 바다로 잠수했다. 떡대는 여전히 헤엄을 치는 중이었다. 벽돌이 막내를 붙잡고 바다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잡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막내도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변을 향해 헤엄쳤다. 벽돌도 그 뒤를 따라 헤엄쳐왔다. 문제는 떡대였다. 떡대는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수평선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야! 돌아오라고! 내가 소리쳤다. 막내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했다. 떡대는 계속 앞으로 헤엄쳤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렇게 헤엄을 잘 쳤나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떡대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벽돌과 막내는 자신들을 지나치는 떡대는 멍하니 지켜봤다. 한참을 지켜보다 다시 슬금슬금 돌아왔다. 떡대는 계속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어서, 떡대의 형체가 작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떡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앉아서 바다만 바라봤다. 해는 진 지 오래였다. 조금의 빛도 남아있지 않아서 우리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건지, 모래사장에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조류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벽돌이 말을 꺼냈다.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지 묻자. 벽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영할 줄 알았냐? 내가 막내에게 물었다. 막내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어두운 탓에 벽돌과 막내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웃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신고해야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가 직접 경찰에 신고하는 건 자수와 다름없었다. 조직 고위층이 경찰과 유착 관계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여기까지 내려온 이상 조직이 우릴 보호해 줄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공중전화로 신고하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막내가 공중전화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 사이에 벽돌은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벽돌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벽돌의 표정을 볼 수 없어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십 분 정도가 지났을 즈음 멀리서 모래를 박차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막내는 숨이 차는지 말을 한 호흡에 이어가지 못했다. -금방 올 테니까 대기하랍니다. 말을 듣자마자 등골에서 땀이 한 줄 흐르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나와 벽돌은 일단 차가 있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막내가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쫓아왔다. 경찰차가 보이지는 않았다. 벽돌은 급하게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나도 급한 대로 조수석에 앉았다. 막내는 힘이 달리는지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이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어있었다. 벽돌이 차에 타려는 막내를 주먹으로 후려치려 했다. -일단 타. 내가 말했다. 막내는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숙소로 가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습기로 가득했다. 에어컨이 고쳐졌나 싶어서 다시 틀어봤지만 여전히 따뜻한 바람만 나왔다. 벽돌이 에어컨을 끄려고하는 걸 내가 손으로 막았다. 따뜻한 바람을 계속 맞고 있으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벽돌과 막내는 창문을 열고 싶은 것 같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 명 사라지니 아까보다는 쾌적한 느낌이었다. 차 안은 고요했고, 도로는 가로등만 간간이 있을 뿐 대부분 어둠에 침식되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벽돌이었다. -자수할 생각이었냐? -떡대 형님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내는 거의 울먹였다. 벽돌은 무표정했다. 화가 난 건지, 웃음을 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며 떡대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떡대가 물에 들어가기 전에 죽고 싶냐고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까지 몸을 푼 건 죽기 싫다는 뜻이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도착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숙소의 샤워기에선 바닷물보다 차가운 물이 나왔다. 벽돌이 먼저 욕실로 들어가 씻으려 했는데, 오 분도 안 되어 뛰쳐나왔다. 막내는 경찰에게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을 끄고 있었다. 나는 혼자 젖지 않았기에 옷만 갈아입고 바닥에 누웠다. 벽돌은 씻는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한참 기다렸고 했다. 막내는 숙소 밖 계단에 앉아있었다.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혼자 누워있어야 했다. 누운 지 두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막내와 벽돌 모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벽돌과 막내는 이불을 조심히 펼쳤다. 불이 켜져 있어 눈이 부셨다. 벽돌과 막내도 불을 끄지 않은 채로 누웠다. 나도 불이 켜져 있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숙소는 어제보다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덕분에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구가 한 명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벽돌과 막내도 어제보다는 자유분방하게 누웠다. -죽었을까요? 막내가 물었다. -자라. 벽돌이 대신 대답했다. 잠을 설친 덕분에 어제보다 몇 배는 피곤한 아침을 맞이했다. 막내와 벽돌은 아직 눈을 뜨지도 못했다. 이제 겨우 이틀 지났을 뿐인데 이년은 지난 것 같은 피로였다. 벽돌과 막내를 깨워 바다로 향했다. 벽돌은 갑자기 일어난 탓에 거의 졸면서 운전했다. 막내는 계속 돌아가자고 중얼거렸다. 경찰을 만나면 어떡하냐는 거였다. -어떡하긴. 감방 가야지. 내 말을 듣고 막내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해변은 어제처럼 아무도 없었다. 혹시 내가 어제 꿈을 꾼 건 아닐까. 사실 떡대는 내려온 적도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변 위 주차장 구석에 주차되어있는 경찰차를 보고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막내는 몸을 숙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벽돌은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왔다. 겉면에 일본어가 써있었다. 나는 두목을 떠올렸다. 내 몸에 적힌 일본어를 떠올렸다. 두목이 목 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 떠올렸다. -그만해야겠어. -뭘 말입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돌은 한참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다. 나는 벽돌의 얼굴만 멀뚱하게 쳐다봤다. 벽돌은 무릎 사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도 깡패 같지는 않았습니다. 벽돌이 혼자 말하고 혼자 낄낄댔다. 나도 따라 웃었다. -재미가 없잖아. 왜 그만두냐는 벽돌의 질문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다 끝난 것 같습니다. 벽돌은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나도 따라 들이켰다. 목 끝에서 시원하고 알싸한 감각이 느껴졌다. 속초로 보내진 시점에서 우린 이미 깡패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문신이 있다고 다 깡패는 아니니까. 해양경찰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몇 명 돌아다녔다. 그중 몇 명 정도는 보트를 타고 돌아다녔고, 나머지는 해변을 수색했다. 경찰이 우리에게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도, 힘도 없었다. 우린 해변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봤다. 어제보다 햇빛이 강했다. 벽돌이 그만두면 뭘 할 건지 물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면서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두목이 내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영수를 찾아가 복수했을까. 잘 모르겠다. -일본어나 배워 보려고. 벽돌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문신에 적힌 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지. 벽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햇빛 탓인지 맥주는 그새 온도를 높이고 있었다. 갑자기 맥주가 마시기 역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서서 바다로 걸어갔다. 그리고 캔을 흔들어 남은 맥주를 뿌렸다. 이미 거의 다 마신 상태라 거품이 더 많이 나왔다. 거품은 파도와 함께 부서졌다. 마지막 남은 맥주까지 털어내자 더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캔도 구겨서 바다로 던져버렸다. -거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해양 경찰 조끼를 입은 사람이 나한테 다가오며 소리쳤다. 호루라기 소리도 들렸다. 막내는 이미 어디로 숨었는지 없었고, 벽돌은 모르는 사람처럼 딴 곳을 보며 맥주만 홀짝였다. 나는 웃옷을 벗어 던졌다. 경찰이 잠시 주춤했다. 주머니에서 뭘 꺼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 소리에 경찰은 경계 태세를 한층 더 강화했다. 나는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경찰이 윽박지르는 소리가, 벽돌이 당황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그대로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맥주보다 시원한 바다의 온도를 느끼고 있자니 궁금해졌다. 떡대는 어디로 갔을까. 모르겠다. 다만 배를 가르지 않았기에, 지중해 어딘가에서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대신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팔을 휘적거리자 해초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팔을 휘젓는 대신 그 느낌에 집중했다. 문득 사무실에 걸려있던 액자가 떠올랐다. 액자가 어떻게 생겼었는지를 떠올렸다. 그 안에 적혀있던 글자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액자가 걸려있는 사무실을 생각하니, 마음이 나른해졌다. 맥주를 마신 탓일지도 모른다. 그럼, 辛い時は休みます. 이재윤(경제금융학부) 연속으로 학술상에 이름을 올리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여러가지 고민으로 바쁜 한해였는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기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소설 가작]직선으로
[소설 가작]직선으로 소희는 4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명동에 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해지도록 신고 있는 낡은 어그 부츠,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큰아버지가 사주신-그녀의 유일무이한 명품-블랙 프라다 반지갑. 그리고 길거리를 걷다 보면 두세 명은 꼭 겹치는, 희소성이라곤 전혀 없는 보세 옷을 걸친 본새였다. 손잡이를 잡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은 영하로 떨어진 기온이 무색하게 후덥지근했다. 다들 명동에 가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나 많은 인원을 태우고도 곧잘 운행하는 교통의 용이함을 몸소 느끼며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려고 손을 움직이는 순간, 덜컹, 하마터먼 넘어질 뻔했다. 아무래도 이 비좁은 공간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하기엔 여유가 너무 없지. 소희는 핸드폰 꺼내기를 포기하고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의 핸드폰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공간에선 할 수 없는 일을 손쉽게 하고 있는 남자의 화면에는 ♥로 저장된 누군가와의 연락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여자 친구였다. ‘자기야 어디야?’로 시작해 무수히 쏟아지는 애정 표현들과 간간이 보이는 귀여운 강아지 이모티콘이 달달해 하마터면 동공이 녹을 뻔한 소희는 눈을 돌려 대각선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짙은 화장에 실버 목걸이를 하고 머리를 배배 꼰 여자. 고데기에 시간 꽤나 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목걸이의 가격을 생각하며 고데기를 데울 시간에 미용실 예약이 더 쉬운 사람이겠다고 마음대로 추측해 본다. 다소 음침한 탐구 활동을 즐기며 시간을 죽이니 금방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명동, 명동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소희는 몸을 구기고 비틀며 문을 향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래, 달팽이도 바다에 꿈을 두는데, 저 지하철 문에 다가가는 걸 꿈으로 두는 게 뭐 대수라고. 이 좁고 더운 지옥에서 기필코 탈출하리라 마음먹는 게 뭐 대수라고.’ 치이익, 문이 열리자, 소희는 온 힘을 다해 밖으로 몸을 떠민다. 내릴게요, 내릴게요. 잠시만요를 다섯 번 정도 외치며 용감하게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한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디로 가는 지로 모른 채 갇힐 뻔했다. 늘 타는 지하철이지만 이럴 때마다 무섭기도 했다. 못 내렸으면 어쩔 뻔했어. 적응되지 않는 지독한 인구 밀도에 질린 듯 몇 마디 웅얼거린다. 소희의 어리광은 3분 정도면 끝난다. 다시 숨을 고르고, 그녀를 내려놓고 아직 내리지 못한 수많은 여정을 싣고 가는 4호선을 잠시 응시한다. 저들은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얼마나 간절하면 저 틈에 끼는 것도 마다할까. 그러다 이내 걸음을 딛는다. 낡은 어그의 감촉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는다. 그녀에게도 간절히 원하는 공간이, 교통 체증을 감내하면서까지 가야만 하는 목적이란 게 있었다. 삐빅,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출구로 나서자 컨테이너 박스처럼 딱딱하던 지하철의 공기는 온데간데없이 겨울만이 가득했다. 흘러나오는 캐럴과 가게마다 즐비한 크리스마스트리, 거리 곳곳에 늘어져 있는 따뜻한 색감의 조명이 영하의 온도까지 녹이는 듯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란 사람을 가볍게 만들기 좋았다. 소희만 빼고. 중심가에 들어서니 사람들은 숲을 이룬 나무들처럼 빽빽하다.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고등학생 무리들이 있고, 시밀러룩을 맞춰 입고 서로를 껴안는 연인도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강아지를 품에 안은 가족들도 있었다.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구경하던 소희는 남들 다 쓰는 에어팟 대신 한철 지난 이어폰을 꽂는다. 늘 오래된 것들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그녀였다. 귀에 욱여넣는 멜로디도 역시 한철 지난, 그렇지만 사랑받는 김광석의 노래들. 그의 음절을 듣고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차가 밀려 떠들어대는 자동차의 경적도, 설렘으로 헬륨처럼 한없이 가벼워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도, 겹겹이 쌓여 어지러운 팝의 영어 가사들도, 세계를 감싼 즐거운 리듬도 소희의 이어폰 앞에서는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소희에게 외로움이란 너무나 당연해서 없는 듯하면서도 꾸준히 존재하는, 마치 닦지 않는 책장 위 수북이 쌓인 먼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치우지 않는다. 치워도 치워도 자연스럽게 다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울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임을 익히 알고 있던 그녀였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읊조리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숨을 쉴 때마다 후, 후 불어 나오는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 이내 캐럴 속으로 사라진다. 그걸 지켜보는 것이 소희가 겨울을 음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걸음을 뗀 그녀의 목적지는 명동 골목의 어느 즉석떡볶이집이었다. 번화가가 아니라 인적이 드물고 그래서인지 겨울 냉기가 코트를 뚫고 느껴지는 곳이었다. 거리의 빈틈을 노려 그녀의 외로움도 점차 부피를 넓혀 가는 아홉 시 사십 분, 마지막 코너를 돌았더니 낡은 가게 간판이 보였다.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만 이미 추위에 붉어진 손을 꺼내 가게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소희의 눈에 테이프로 붙여져 있는 에이포 용지가 보였다. ‘임대 예정’ 단 네 글자였다. 결국 노크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서게 된 소희는 여정의 실패에도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듯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어그 부츠를 질질 끌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보폭이 좁아지더니, 별안간 걷는 것을 포기하는 소희. 코너 직전 블록에 서서 가만히 호흡한다. 물론 이건 소희의 희망에 불과할 뿐이다. 가만히 호흡 하는 것은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추워서 몸이 떨리는 거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녀가 내뱉는 공기엔 이제 여분의 습기가 젖어 들어 있었다. 흘러나오는 캐럴, 웃음이 끊이지 않는 이브의 저녁, 그 공간 속 소희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았다. 세계에게 부정당한 불행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만 같았다. 결국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펑펑 운다. 이건 추위 때문도, 타인의 행복 때문도 아니었다. 소희는 저 네 글자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마음이 너무 시렸다. 무언가의 부재는 이제 그녀에게 버거웠다. 안녕을 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에 그녀는 아직 어렸다. 소희가 명동에 오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지난 겨울까지 소희 곁엔 재영이 있었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둘은 줄곧 친구로 지냈었다. 사는 동네가 비슷했고, 취미가 비슷했고, 성격이 잘 맞았다. 시험 기간엔 도서관에서 공부를 같이 했고, 나란히 전교 일이 등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어쩌다 같이 영화를 보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러도 소희에게 재영은 그리 무겁지 않은 존재였다. 연애에 대한 생각이 없기도 했을뿐더러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 그저 좀 귀여운 경쟁자 정도로만 생각했을 터였다. 그러다 수능이 끝난 열아홉의 겨울 어느 하루, 재영이 먼저 고백했다. 같이 눈사람을 만들고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 마셨던 날,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고백하던 재영의 귀는 터질 듯 빨갰다. 추위 때문이었는지, 소희 때문이었는지는 재영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 너 좋아한다, 소희야.” “너랑 쭉 같이 있고 싶어. 다음 겨울도, 그 다음 겨울도 말이야.” “이건 좋아하는 거 맞지?” 고백을 들은 소희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코코아를 떨어뜨릴 뻔했다.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짧게 만났다 헤어지는 것보다 좋은 친구로 오래 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려고 한 순간, 재영과 눈이 마주쳤다. 마음을 알고 싶으면 눈을 보라고 누군가 그랬었던 것 같은데. 소희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사랑을 많이 해 봤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를 담은 재영의 눈동자는 처음 보는 색이었다. 코코아색보다 짙고, 우주보단 덜 어두웠다. 소희는 그 작은 동공에 담긴 자신이 신기했다. 그래서 재영의 마음을 받기로 했다. 자신을 그런 눈빛으로 보는 사람을 재영이 처음이어서, 그 새로움과 낯섦이 설레고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소희의 볼도 빨개졌을 것이다. 이건 재영 때문이었다. 그날부터 소희와 재영은 쭉 함께했다. 첫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주민등록증을 이마에 붙이 고 술집에 들어가 보고, 취할 때까지 소맥을 말아 마셨다. 누가 봐도 비틀비틀 걷고 있으면서 자기 똑바로 걷는다고 우기는 재영의 볼에 소희는 입 맞췄다. 귀엽다면서. 봄엔 함께 벚꽃을 보러 다녔다. 개화 시기에 맞춰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려고 애썼다. 만개한 벚나무 아래에서 둘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사랑을 만끽했다. 벚꽃축제에서 파는 비싼 닭꼬치도 한 입씩 나눠 먹고, 포토 스폿에서 서로를 담았다. 여기 봐, 재영아. 너 지금 진짜 예뻐. 소희는 벚꽃도 좋았지만, 곧 산발할 봄에 선명히 존재할 재영이 백 배 더 좋았다. 여름에는 바다를 보러 갔다. 재영은 바다를 좋아했다. 파도의 파열음이 좋다고 했다. 소희는 재영을 좋아하면서 바다도 함께 좋아하게 됐다. 나뭇가지를 주워 젖은 모래에 이름을 쓰고, 샌들이 더러워져도 바다가 선사하는 낭만을 움푹 밟으며 놀았다. 장마철엔 우산을 쓰지 않고 밖에 나갔다. 온몸이 젖고 그다음 날 감기에 걸릴 것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비에 젖은 재영의 머리카락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떨림과,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져 주는 재영의 손길은 언제 느껴도 짜릿한 애정으로 다가왔다. 가을엔 독서 데이트를 즐겼다. 망원동엔 둘이 자주 가는 헌책방이 그득했는데, 오죽하면 헌책방 사장님이 그만 좀 오라고 말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헌책 냄새를 향수 삼아 살았다. 소희는 시를, 재영은 수필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나와서는 거리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구경했다. 가끔 낙엽이 재영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 깔깔 웃었다. 소희에게 재영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이었다. 그리고 겨울. 소희와 재영은 연인으로서 두 번의 첫눈을 함께했다. 그리고 둘은 매년 겨울 마다 명동의 즉석떡볶이집에서 떡볶이 2인분, 튀김 세트, 어묵꼬치 두 개와 공짜 어묵 국물 세 컵을 즐겼다. 열아홉일 땐 꽤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스무 살의 겨울에는 아르바이트 덕분에 넉넉히 먹을 수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재영이 계산했다. 자기도 이제 돈 버는 어엿한 성인 남성이라나 뭐라나. 소희는 어른인 척하는 재영이 웃겼지만 봐줬다. 재영이 하고 싶은 건 하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떡볶이집을 나오자마자 재영의 손을 꽉 잡고 또박또박 얘기했다. “내년엔 내가 사 줄 거야” “아닌데? 내년에도 내가 사 줄 건데?” “바보야, 내가 먼저 계산할 거거든” “너 지금 나한테 바보라고 했어? 아아 유치해” 싸움의 승자는 소희였다. 재영은 돈 많이 깨질 거라고 소희를 겁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였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똑같으니까. 결국 스무 살 땐 재영이, 스물한 살 땐 소희가 사 주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소희는 자신이 당연히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재영도 그랬을 것이다. 둘은 영원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거라고 믿으며 선명한 행복을 주고받았다. 무뎌지지 않는 애정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 사실도 둘은 몰랐다. 애정도 약속도 여전히 유효했던 유월, 재영은 소희를 만난 올해 여름의 토요일을 마지막으로 떠났다. 안녕도, 작별 인사도 고하지 못하고 부서졌다. 줄곧 선하게 살았던 재영의 목숨을 앗아간 것 역시 선함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와중,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일 것만 같던 어린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선하게 끝난 그의 일생의 파편은 전부 소희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심장에 박혀서 빠지지 않았다. 소희는 한동안 멍하니 함구하며 살았다. 자신이 죽은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가 머금을 수 있는 이름이 없었고, 그녀가 만질 수 있는 형태가 없었고, 그녀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에 대한 부재는 그녀의 모든 삶을 부정하게 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데 왜 여기 있어야 해? 소희는 재영과 함께한 계절을 사랑했지 그가 없는 계절까지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일상도, 그가 없는 세계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 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절망으로 귀결되는 순간들뿐이었다. 절망하는 게 습관이 되면 소희는 정말로 자기가 갑자기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재영이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만큼 속상하고 무의미한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거다. 소희는 재영을 알았다. 그래서 살아냈다. 나 너한테 떡볶이는 사 주고 죽을 거야. 그렇게 육 개월을 꼬박 버텨 맞이한 오늘이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오늘, 애써 부정하고 지낸 너의 부재를 체감하게 하는 오늘 한가운데 나는 대체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재영아. 소희는 울었다. 그리움에 적셔진 차가운 아스팔트. 이어폰을 타고 들리는 노래. 추위에 지지직거리는 음성이 소희에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 한없이 무너져 아파하던 소희의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주름 잡힌 손이 건넨 손수건이었다. 벌게진 눈으로 올려다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떡볶이집 아주머니. 소희는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벅벅 닦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요, 이렇게 다시 보니까 반갑네” 아주머니는 그 시간 그대로 멈춘 것처럼, 재영과 함께 왔던 그날과 똑같이 여전하셨다. 울고 있는 소희를 잠시 지켜보던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임대 예정이라는 에이포 용지를 뒤로 하고 안으로 들어온 소희는 거의 다 정리되어 쓸쓸함이 감도는 내부를 보니 자꾸만 서러워졌다. 이제 여기도 사라지는구나. 이제 너와의 추억도 희소 해지는구나. 다시금 재영을 생각해 보는 그녀였다. “학생이 소희 맞지? 재작년부터 매년 오던” “어떻게 아셨어요?” “기억할 수밖에 없지. 혹시 올해도 올까 하고 와본 건데,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하나 남은 테이블에 마주 앉은 소희는 아주머니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갔을 때는 늘 테이블이 만석이었다. 연말이라 다른 가게 웨이팅을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어서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눈에 띄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늘 재영과 함께 왔었기 때문에 혼자 오면 기억하기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학생한테 줄 게 있어가지구” “이거 안 주면 큰일 난다고 해서... 근데 같이 안 왔네” “헤어졌어두 그냥 받어요” 다시 소희의 앞으로 온 주름진 손. 아주머니의 손에는 편지처럼 보이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편지 겉봉투에 정갈하게 적혀있는 소희에게. 작년 겨울, 재영이 떡볶이를 계산하면서 몰래 숨겨 달라고 했던 편지라고 했다. 소희한테는 비밀이라고, 내년에도 여기 꼭 올 테니까 그때 같이 오면 서프라이즈로 소희한테 주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던 재영. 1년이나 가지고 있으면 잃어버릴 것 같아 거절했지만 재영이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 안 들어줄 수가 없었다고. 자기 이거 꼭 1년 뒤에 줄 거라고, 그러려면 아주머니 도움이 절실하다고 넉살 좋은 웃음을 띠던 청년이 마음에 들어 장롱 속에 꼭꼭 숨겨 두셨다고 했다. 그러다 가게를 내놓으면서 연말에 이사를 가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혹시 올까 봐 이번에도 나와 보신 거라고 담담히 말하시는 아주머니의 음성을 듣자 소희의 눈에 다시 눈물이 들어찼다. 재영은 수필을 좋아해 글을 자주 쓴다고 했지만 자신의 글을 소희에게 보여 준 적은 없었다. 아무리 보여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떼를 써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였다. 소희에게 보이지 않았던 재영이 드러나는 순간. 감사 인사를 전한 후 편지를 받아 들고 나온 그녀는 아무 골목이나 들어가 곧장 봉투를 열었다. 다시 오지 못할, 그녀의 유일과 재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소희는 이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희에게 소희야, 나 재영이. 이렇게 네 이름을 부르니까 어색해 죽겠다. 너한테는 내 글을 보여 준 적도, 써 준 적도 없어서 그런가 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사실 별거 없어. 나 이제 너 한텐 뭐든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너한테 고백하고 싶어서 적어 봐.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했던 게 작년인가. 이건 아마 내년 크리스마스에 받을 거니까 네가 읽을 때는 재작년이겠네. 그땐 정말 떨렸어. 귀가 엄청 붉었을 거야. 그거 추웠던 거 아니고, 너한테 말하는 게 너무 떨리고 부끄러워서 그랬어. 나는 널 분명히 좋아했지만, 네가 같은 마음일 거라는 확신은 없었거든. 그런데도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흘러넘쳐서 주체할 수가 없더라. 나를 받아 줘서 정말 고마웠어. 지금도 여전히 고마워. 내년에도 그럴 거야. 빼곡하게 흰 첫눈 같은 소희야, 나는 지금 정도도 모르고 무모하게 너를 사랑하고 있어. 적당 함을 모른 채로 누구보다 치기 어리게. 널 끌어안은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칠월의 더위보다 쉽게 녹을 것만 같아. 우리가 만난 지 벌써 2년이지. 내년에는 3년이 되겠다. 가끔 네가 너무 예뻐서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몇 번 말했었을 거야. 넌 너무 예뻐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럴 때마다 너는 단호하게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화냈었는데. 지금 떠올려 봐도 참 귀여워. 너는 늘 내 생각이 아무것도 아니게 해. 늘 나를 초과해. 그래서 네가 좋은가 봐.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든 너를 놓지 않을 거야. 이미 너는 나한테 너무 많이 묻어 있어서 지울 수가 없거든. 그리고 우리가 함께라면 두려울 게 뭐야? 지구가 사라진대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면 무섭지 않아. 언제나 명백한 사랑으로 살아갈게. 지금 옆에 있겠지만, 내가 이미 너한테 수백 번 말해 줬겠지만, 그래도 좋아해. 내 사랑이 언제나 너한테 당연한 일이었음 좋겠다. 메리 크리스마스. 재영이가 * 이 순간만큼은 재영과 함께인 것만 같아서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고 싶지 않기도 했 다. 재영이 그녀를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자기 없다고 울보처럼 울기만 하는 그런 여자친구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은 싫었다. 소희는 그저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재영.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은, 문장 하나하나 느껴지는 마음은 소희의 그리움을 앞질렀다. 그녀는 재영의 부재 이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비로소 내뱉는다. 뱉으면 사라질까 두려워 숨겼던 재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비로소 떠올린다. 목구멍에 맺힌 것들을 죄다 꺼낸다. 그녀는 이제 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랑도 있다는 걸. 영원이란 게 정말 있다면 그건 재영이라는 걸.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재영아, 메리 크리스마스” 언제부터였는지 언제 끝난 건지 소희는 지금도 모른다. 너무 잔잔하게 멎어서 많이 울었다. 눈이 아파서 세수를 하러 가다가도 울고, 빨래를 널다가도,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다가도 주저앉은 적이 허다했다, 오랜만에 숨을 쉬려고 하면 폐가 울었다. 안 울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글로 적으려고 하면 손이 굳었고, 일기는 늘 끝을 맺지 않은 채 덮었다. 자신의 구겨진 독백들은 어차피 재영에게 전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작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를 한철 인연이라고 생각해 봐도 소희는 그 인연에 자꾸 무너져서. 어쩌면 소희가 혼자 떡볶이집에 왔던 것은 더 이상 무너지기 싫어서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영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면 그렇게라도 그를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재영에게 인사를 하니 이 순간이 오길 바랐던 듯 눈이 내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재영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눈 오는 성탄의 거리. “분명 혼자인데 같이 있는 것만 같으면, 네가 정말 있다는 뜻일까?” “이게 너와의 진정한 마지막이라면, 그런 거라면 말이야” “우리 이제 정말 작별하자, 재영아” 소희를 닮은, 빼곡히 흰 눈이 내린다. 그녀의 어그 부츠를 적시며 소복히 쌓이는 하얀 결정에 뚜렷하게 깃든 온기. 재영일 거다. “잘 지내, 나도 그럴게” * 소희는 4호선 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스물 한 살이 된 지금까지 해지도록 신고 있는 낡은 어그 부츠,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큰아버지가 사주신-여전히 재영의 스무 살 주민등록증 증명사진이 들어 있는-블랙 프라다 반지갑. 그리고 길거리를 걷다 보면 두세 명은 꼭 겹치는, 희소성이라곤 전혀 없는 보세 옷을 걸친 본새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손에 꽉 쥐고 있는 한 통의 편지, 그리고 그녀의 몸 곳곳에 묻은 눈, 어쩌면 재영일지도 모르는 존재. 막차를 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제 음침한 탐구 활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 소희는 앉자마자 명동에 갈 땐 꺼내지 못했던 핸드폰을 켜 메신저를 열었다. 즐겨찾기 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에 고정된 ♥가 눈에 띈다. 작년 여름에 멈춘 대화. 전화번호가 바뀌면 다른 사람이 메시지를 받을 테니 쉽사리 보내지 못했던 임시저장 메시지들도 쌓여 있었다. 그녀는 스크롤을 올려 작년 크리스마스로 돌아갔다. 즐거웠다고, 덕분에 재미있게 보냈다고 고맙다는 내용의 문자 몇 개와 사랑한다는 말. 메리 크리스마스와 트리 이모티콘 잔뜩. 떡볶이 사진과 어묵 꼬치를 들고 찍은 소희의 사진, 재영의 사진. 함께 찍은 셀카 한 장. 이제 찰나가 된 순간이 되었지만 소희는 그것 또한 가만히 느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안녕을 고했다. 재영에게, 재영의 옆에 있던 작년의 그녀에게, 재영과 소희의 시간에게, 둘의 현재였던 사랑에게. 그렇게 소희는 돌아갔다. 그리고 나아갔다. 재영은 없으나 그의 마음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로. 이제 그가 없어도 따뜻한 겨울이, 그가 없어도 시원할 여름이 올 것이다. 가끔 감기도 걸리고, 우울할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고 해서 무너지고 절망하는 순간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재영의 부재가 선명할 아픈 미래도 그녀가 마주해야 할 하루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희는 매 계절마다 어김없이 안부를 전할 것이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늘을 떠올리며, 재영을 읽고 재영에게 읽히며 어김없이 살아갈 것이다. 이제 소희에게는 그녀가 그녀로 존재하며 살아갈 인생의 여정에 다다르고자 하는 새로운 목적지가 생겼으니까. 명동도, 떡볶이집도 아닌 아직은 희미한, 그렇지만 반드시 명백해질. 재영의 품에 파고드는 살결로 존재했던 과거를 간직한 채, 언제나 사랑스러운 그의 연인으로서 말이다. 일렁이는 입김이 외로움을 불러도 이제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을 수 있다. 뒤돌아보지 않고 직선으로. 여전히 낡은 어그를 신고, 저 멀리 보이는 봄을 향해. 최지윤(역사콘텐츠전공) 우선 좋은 결과 주셔서 감사합니다! 투고에 의의를 두고 쓴 글이었고, 상을 받을 줄 몰라 너무 놀랐어요. 글을 쓰는 내내 후회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썼습니다. 서툴고 투박한 글인데도 보듬어 주시고 예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학술상이 저에겐 많은 꿈과 가능성을 안겨 준 기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언젠가 또 기회가 와서 다시 글로 인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논문 부문 심사평]
[논문 부문 심사평] 이번 상명 학술상에 응모한 논문은 모두 4편이었다. 상명 학술상 논문이 매년 소수 편수에 그쳐서 분야별 심사위원을 구성하지 못하는 애로사항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연구자가 자신의 논문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항은 무엇이고, 그것은 선행 연구와 비교하여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명확하고 충분한 기술이 담긴 논문이 학술 논문으로서 생명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소년법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다른 응모 논문과 달리 <나의 윤리적 글쓰기 서약>으로 자신의 논문이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구성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것일 때는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여러 글을 짜깁기하여 새로운 글처럼 제시하지 않았고 실험과 조사 데이터를 조작하지 않는 등의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상명학술상 논문 응모시 이러한 글쓰기 서약을 논문 시작 부분에 제시함으로써 정직성을 담보하는 것은 참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었다.(다른 논문도 이런 서약을 다른 종이에 제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심사자가 받은 논문에는 이 한편에만 서약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논문은 이 주제를 연구하게 된 동기를 밝힘으로써 연구 가치를 덧보이게 한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해 연구자가 느낀 내용을 잘 표현하면서 주제를 따라간 점도 훌륭했다. 다만 처음 가졌던 생각의 수정이 일어나서 그 논리를 편 것은 좋으나 여전히 개선해야 할 사회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이에 대한 논의를 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장시간 마스크 사용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 현황과 극복 방안”은 연구의 동기 및 목적과 연구해야 할 주제를 잘 기술하고 학술적 연구에 알맞도록 연구 방법도 잘 설정했다.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주제 관련 상황을 잘 분석하고, 개인적 대한 대응 방안의 현황도 잘 조사했다. 아울러 기업 조사를 통한 기업의 대응 방안까지 잘 조사하여 기술했다. 그런데 학술 논문에서 ‘극복 방안’이라는 것은 현상의 분석을 통해 도출된 체계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 표현될 필요가 있다. 학술 논문의 틀을 가장 잘 갖추었고 서술의 논리적 흐름도 괜찮았으나 이런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The formula derived using the sine function for the variation in solar declination based on date, and its validation”은 태양 적위의 변화를 사인함수로 표현하는 방정식을 도출한 논문이다. 날짜를 변수로 하는 사인함수로 표현한 적위 방정식을 도출하고 그 정확성을 실험을 통해 검증함으로써 단일 함수를 사용하여 태양 적위의 변화를 해석하는 데 편리한 척도를 제공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기술했다. 이 내용을 보면 엄청난 발견이고, 그렇다면 전에는 사인함수를 사용하여 태양 적위의 변화를 계산하는 방정식이 전혀 도출되지 않았던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 영역에 문외한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나 이 영역의 연구자가 읽었더라도 심사자가 갖는 궁금증을 풀어줄 설명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아쉬움이 있지만, 차근차근 논리를 더해가며 방정식을 세우고 실제 실험을 통해 검증해가는 과정을 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활성탄을 이용한 BPA 흡착 연구”은 환경호르몬인 BPA를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한 것으로,활성탄으로 물리흡착이 일어나게 하는 실험을 수행하고 그 내용을 학술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 주제가 왜 중요한지 잘 밝혔고 실험 장치와 방법에 대한 설명, 그리고 실험 결과 고찰과 결론 도출 과정, 그리고 한계점까지 정연하게 잘 기술되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발견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다. 학술 영역도 다르고 주제도 다양했으나 위와 같은 장점과 아쉬운 점들을 고려하여, “활성탄을 이용한 BPA 흡착 연구”를 당선작으로 정하고 “The formula derived using the sine function for the variation in solar declination based on date, and its validation”을 가작으로, “장시간 마스크 사용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 현황과 극복 방안”을 입선으로 뽑는다. 한국언어문화전공 김미형 교수
[논문 입선]장시간 마스크 사용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 현황과 극복 방안
[논문 입선]장시간 마스크 사용으로 인한 피부 트러블 현황과 극복 방안 조나경(식품영양학전공) 좋은 기회로 수상을 하게 되어 감사하고 마스크로부터 자유로워진 요즘 많은 사람들이 피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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